김해규,장연환의 평택역사산책- 열일곱 번째 이야기

▲ -진위면 동천1리 경주 이씨 묘역
▲ -안재홍 생가 사랑채 두릉산방
▲ -충의각
▲ 은산리 삼봉정도전 사당 문헌사
▲ 김 해 규 한광중학교 교사 향토사연구가

불팔(八不)의 고장이라던 평택

평택에서는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정설처럼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다. 자고로 인물이란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는 데 우리고장에는 큰 산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가 20여 년 전 향토사를 연구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우리고장에는 인물도 없고 문화도 없다’라고 잘라 말하는 지인도 있었다.


향토사를 연구하면서 ‘평택에는 인물이 없다’라는 말은 오랫동안 화두로 남아 있었다. 사람을 키워 세상에 희망을 줘야 하는 필자는 훌륭한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평택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고민을 심각하게 한 적도 있다. 결혼하여 아이들이 태어나면 서울은 아니라도 수원에라도 유학이라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역사를 공부하면서 ‘큰 산은 큰 인물을 나게 한다’라는 등식이 갖고 있는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등식에는 봉건적 지배의식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서는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이 농경에 유리하였다. 농경에 유리하고 물을 얻기 쉬운 곳은 일찍부터 지배층의 삶터였다. 우리고장에서도 무봉산, 덕암산, 태봉산처럼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에 지배층의 동족마을이 형성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근대이전에는 사회적신분과 농업경제력을 갖춘 가문이라야 자녀교육과 관직진출이 가능하였다. 농경활동이 어려웠던 저습한 평야지대의 상민층이나 천민들은 아무리 똑똑해도 교육을 받거나 관직진출을 하기가 어려웠다. 근대이전 평택지역은 저습한 평야지대였다. 더구나 바다가 가깝고 수로가 발달하여 저습지의 대부분은 간석지거나 황무지였다. 생산력이 낮은 저습지대는 수탈의 대상이었지 지배층의 거주지는 아니었다. 명망 있는 가문이 없다보니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큰 산의 정기가 아닌 사회경제적 조건이 인물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학문과 덕행으로 족적을 남긴 사람들

열악한 주거조건, 척박한 경제환경이었지만 우리고장에도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 많았다. ‘조선건국의 설계자’로 추앙받는 삼봉 정도전이 그렇고, 학문과 덕행으로 추앙을 받았던 조광조, 최수성, 우남양, 최자반,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 이승훈, 병자호란 때 삼학사로 추앙받았던 홍익한과 오달제, 독립운동가 안재홍이 그들이다. 조선시대 명문거족으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경주이씨 가문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독자들 가운데는 ‘이들 대부분은 평택출신이 아니다’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도전은 경북 봉화가 고향이고, 조광조는 서울, 최수성은 강릉, 이승훈은 경기도 광주, 오달제는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평택지역과 관련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거주지가 한 곳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고향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관직에 진출하면 서울에도 집을 두었고, 전장(田莊)에도 집이 있었으며 필요하면 별장도 따로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물에 대한 선양은 출신지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학문활동, 관직활동, 유배지, 묘나 사당, 후손들의 거주지처럼 다양하게 시도되어야 한다.


정도전은 손자 정래가 진위면 은산리에 정착한 이래 대종가가 은산리를 중심으로 맥(脈)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곳에 사당과 가묘, 기념관까지 있어 마땅히 우리고장에서 선양해야할 인물로 평가된다.
조광조는 이충동 일대에 장토(庄土)와 집이 있었고 외가가 근처에 있어서 어린시절을 평택에서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관직에 진출해서도 신장1동 남산기슭에 가까운 벗 최수성이 살고 있어 내왕도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남양과 최자반은 평택에서 나서 평생을 살며 학문과 덕행으로 칭송을 받았고, 당대의 신진사류 조광조, 최수성, 김안국 등과 교유하였던 사림(士林)이었다. 이밖에도 평택현감을 지낸 이승훈, 병자호란의 삼학사 홍익한, 오달제, 해방 전후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였던 안재홍도 우리고장을 빛낸 인물들이다.


경주 이씨는 평택지역의 자랑이 될 만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백사 이항복의 증조부 이성무의 후손들로 명재상으로 이름 높은 백사 이항복, 영조 때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이광좌, 이태좌, 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계조, 고종 때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원과 이유승, 일제강점기 서간도 삼원보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이회영과 형제들, 임시정부 요인으로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김대중 정부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등 기라성 같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경주 이씨

하지만 경주 이씨는 권력과 재물로만 이름을 남긴 가문이 아니다. 조선왕조 오백년 사직이 무너지고 민중들은 일제의 지배와 수탈에 허덕일 때, 대부분의 지배층이 민족적 사명과 양심을 버리고 가문과 일신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굴종할 때, 경주 이씨는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청산리, 봉오동 대첩도 경주 이씨 가문에서 세운 신흥무관학교출신이 주축을 이뤘다는 사실은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평택에 태어난 인물들 가운데는 유난히 무인들이 많다. 조선시대에 무인이 많다는 것은 급이 낮은 양반가와 상민출신으로 출세했던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급이 낮은 양반가가 많았던 것은 앞서 말했지만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기인한다. 문과에 급제하려면 20년, 30년 동안 일하지 않고 공부만 해야 하는데 그 정도의 재력이 없었던 집안에서는 문과보다 쉬운 무과를 통하여 출세를 도모했던 것이다.


미미한 가문출신이었지만 평택출신의 무인들 가운데는 국난극복에 앞장서서 나라와 민족을 구한 인물이 많다. 공신(功臣)이나 충신(忠臣)정문을 받은 사람도 여럿이다. 세조 때의 최유림, 임진왜란 전후의 이대원과 원균, 원사립, 원연, 방덕룡, 정담수가 그들이다. 어떤 이는 수 만 명의 병졸을 지휘하였던 장수였고, 누구는 미관말직에 불과하였지만 국난을 당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던 그들의 삶은 후세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고장에는 문화와 예술로 족적을 남긴 인물도 많다. 판소리 8명창 가운데 한 명인 모흥갑은 가왕 송홍록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적벽가로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명창이었다. 그의 소리는 헌종임금에게까지 사랑을 받아서 나중에 동지(同知)라는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흥갑은 김제와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말년에 전주에서 사망했다는 점 때문에 우리고장에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

해금산조와 피리시나위의 명인 지영희는 포승읍 만호리 출신이다. 특히 피리시나위 솜씨는 매우 출중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지영희는 1966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창설하여 초대 상임지휘자와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며 후진양성에도 힘을 섰던 국악계의 거목이었다.


문화예술하면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 평택농악을 빼 놓을 수 없다. 웃다리지역 전문예인들의 기예와 평택지방 두레풍물패의 기예가 조화를 이룬 평택농악은 이제는 평택을 벗어나 세계의 문화예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밖에도 영향력 있는 대중음악가 정태춘과 박상민, 시인 박후기, 설치예술가 최병수 등도 우리고장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이다.


평택지역의 인물들은 과거에도 훌륭했지만 미래에 더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될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를 거치며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2000년을 전후하여 평택항과 각종 산업단지가 건설되면서 지역경제가 몰라보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평택지역이 갖고 있는 개방성과 수도권이라는 이점은 성장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아쉬운 것은 실물경제에 비하여 인문학적인 소양과 다양하면서도 수준 높은 문화가 부족한데 이 문제는 지속적인 노력과 투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어서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