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우스리스크 답사기

신한촌 흔적과 최재형 독립운동가의 넓은 그늘을 느끼다

장도빈은 우스리스크에서 발해 동경성 유지 등 확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했던 주요 독립운동가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안중근, 이상설, 이동녕, 장도빈, 최재형, 신채호 )

 

한국 해외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태평양 방면에 위치한 대표적인 항만도시이다.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항구가 얼지만 쇄빙선을 이용해 겨울에도 사용가능한 곳으로 도시 이름은 “동방(보스토크)을 정복하자(블라디)”에서 유래했다. 1860년 해군기지로 개항해서 지금도 러시아 동방의 핵심 군사 산업 요충지이다. 인구는 60만 내외의 이 도시는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중 하나였다. 안중근, 유인석, 이상설, 이동휘, 신채호, 이범진, 이위종, 최재형, 장도빈, 조명희, 김알렉산드라 등 한국독립운동사에 핵심인물들이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등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겨울에는 영하 30도가 넘은 엄혹한 추위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이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한인들은 1873년 해안가 부근 고려인 거리로 알려진 “개척리”라는 곳에 정착했다. 여기에는 〈해조신문〉, 〈대동공보〉와 같은 한인 언론사와 교민 교육기관인 한인학교가 위치하고 초기 독립운동단체인 〈성명회〉등이 조직돼 있었으나 1911년 봄 장티푸스 근절을 이유로 러시아 당국에 의해 강제 철거를 당해 새로이 신한촌에 이주했다.

신한촌은 러시아 한인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권업회〉, 〈권업신문〉, 대한광복군 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등이 있었다. 이동휘, 이상설 선생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활동하며 항일의 뜻을 불태웠다. 또한 이곳은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 3.1운동의 시발점이었으며 한인들은 각종 교육과 노래를 통해, “노예의 압박을 받는 민족이여, 자유의 노래를 드높이 부르자”며 민족의식을 불태웠다. 그 뜻을 기억하기 위해 1999년 해외 한민족연구소는 이곳에 기념탑을 세웠고, 이 탑은 러시아 연해주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서거 100년을 맞이하는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과 우스리스크

우스리스크 수이푼강변에 있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우스리스크다. 이곳은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여성 김알렉산드라의 고향이자,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부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히로부미를 처단할 때 총을 구입해 건넨 최재형 선생의 활동 근거지이다. 또한 우스리스크를 흐르는 수이푼 강변에는 올해로 서거 100년을 맞이하는 충북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서있어 답사객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보재 선생은 간도 용정에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사로 파견돼 활동했다. 이후 연해주로 망명 독립운동단체인 <성명회>, <13도의군>, <권업회> 등을 이끌며 식민지 시대 초기 암울한 상황에서 자주독립의 희망을 일구어낸 사람이다.

그러나 1917년 3월 2일 48세의 젊은 나이에 이곳 우스리스크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보재 선생은 임종을 지킨 이동녕, 조완구 선생 등에게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유언을 따라 이 곳 수이푼 강에서 화장해서 그 재를 바다에 뿌렸고 그 뜻을 기억하고자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 유허비 앞에서 잠시 묵념을 했다. “사후 100년을 돌이켜 자기를 바라보라”는 말을 되뇌며 보재 선생과 같이 일생 지조를 지키며 살다간 연해주 지역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했다.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우스리스크에 있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살던 집

이곳 우스리스크에는 최근에야 국내방송등을 통해 조명을 받고 있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최재형 선생은 1858년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린 시절 연해주로 이주해 기업가로 크게 성공한 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 항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실질적으로 지원했으며, 한인 후손 교육을 위해 생전 연해주에 세운 학교도 30개에 달한다.

그러나 1920년 4월 4∼5일 일본군이 한인 마을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습격해 민간인 300여 명을 학살한 “신한촌 참변'으로 안중근 의사를 도운 배후로 지목돼 이때 체포됐다가 탈주를 시도하던 중 4월 7일 일제의 총격을 받고 순국했다. 이곳 고려인들은 최재형 선생의 뜨거운 열정과 따스한 성품을 칭송해 '최 페치카(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라는 애칭을 붙이고 매년 우스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에서 추모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국내에서 최재형선생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한국에서 공부하는 고려인 2세에 대한 장학 사업을 하고 있다. 이곳 우스리스크에는 1917년 5월 러시아전지역의 고려인 대표들이 모여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열었던 곳으로 알려진 현재 우수리스크 실업학교도 남아있다. 그 바로 인근에 최재형 선생이 살던 집이 남아있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최근까지 러시아인 소유였는데 한국정부와 러시아정부의 협력으로 이곳을 기념관으로 꾸며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독립운동가 장도빈 선생의 조선정신 찾기와 우스리스크 발해유적

발해성터 (크라스노야르 성터) 위에서 바라본 수이푼강

이곳 우스리스크에는 발해 관련 유적도 여러 곳에 산재해있다. 이곳이 발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분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이 지역을 최초로 답사한 민족주의 문화사학자 장도빈 선생이다. 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주필로 활동했으며, 신민회에 가입 국권회복운동을 하고 고당 조만식의 권유로 1917년 오산학교 한국사 교사로 재직했고 1920년대부터 국사연구에 몰두 “조선위인전”, “조서역사대전”등 수많은 역사서를 발간했고 1932년에는 동아일보에 조선사를 연재했다. 1934년 9월 민세 안재홍, 위당 정인보 등이 시작한 “조선학운동”에도 뜻을 같이 했다.

일제의 역사왜곡에 맞서 저항하던 장도빈 선생은 1912년 이곳을 방문, 발해 동경성터로 추정했다. 현재 우스리스크 그라스노야르성은 절벽을 방어시설로 강을 자연해자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성 길이가 8㎞, 성벽 높이는 3~5m로 1950년대 발굴에서 대규모 목조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양한 발굴작업이 이루어져 온돌구조, 12세기 송, 원대의 도자기 편, 9세기 당백자도 발견 발해시대 문화층의 추정 가능성이 확인됐다. 이곳 우스리스크시내에는 발해시대의 절터 내에 거북이비석의 귀부 등도 남아있다. 1954년 자벨리나라는 학자도 이곳을 발굴 발해시대로 추정했다고 한다.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답사는 우리 항일민족운동 선구자들의 결기와 신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가슴 뛰는 현장이다. 신한촌, 이상설 유허비, 최재형 선생집, 발해유적, 그 하나하나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우리 선구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소중한 공간들이다. 이번 답사를 통해 절망의 시대를 살면서 희망을 노래한 항일 운동가들의 삶과 그 흔적을 살펴보면서 한인의 뜨거운 생명력을 느꼈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연해주 벌판의 세찬 추위를 이기며 독립운동의 소중한 가치를 느끼고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를 외치며 그 고결한 뜻을 실천한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을 현장에서 몸과 마음으로 기억 전승하면 좋을 것이다.

우스리스크 시내 발해절터에 있는 발해 관련 유적(귀부)

 

(참고문헌) 박환 (2008) 〈러시아 한인유적 답사기〉 국학자료원, 김주용 외 (2009) 〈국외항일운동유적지〉 독립기념관, 리플렛 자료 (2017) 〈고려인 역사관〉 우스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황우갑 전문기자(평택시민아카데미 회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황우갑 전문기자 (평택시민아카데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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