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 이찬형 평택시 주무관

이찬형 평택시 주무관

남부에서 라즈베리를 재배하는 농부가 있었다. 라즈베리 농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다 보니 농부는 늘 바빴다. 그래서인지 농부는 매주 열리는 마을회의에 빠지기 일쑤였다. 농부가 마을회의를 귀찮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말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농부의 라즈베리 농장을 찾아왔다. 그 남자는 이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니, 농부대신 자신이 마을회의에 참가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 남자가 하는 말은 농부에겐 매우 우습게 들렸다. 마을회의같이 쓸데없는 모임을 몸소 나서서 간다니. 얼마나 할 일이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곳에서 하는 회의란 매일 보던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 다음 회의 일정을 정하는 것 그리고 저녁메뉴를 고르는 것뿐인 시시하기 짝이 없는 시간인데 말이다. 농부는 그 남자를 의뭉스럽다고 생각했으나, 늘 아깝게 생각하던 마을회의에 가는 그 시간에 자신의 라즈베리들을 돌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흔쾌히 남자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농부는 벌써 12번이 넘도록 마을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채 라즈베리 재배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라즈베리 농사는 매우 잘 되어 농부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고 농부는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봄이 되면서 하나 둘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농부의 라즈베리 농장 근처에 새로 널찍한 도로가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로를 따라 많은 집들이 들어섰고, 새로운 사람들이 농부의 마을로 이주해오면서 학교와 병원도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맑았던 마을하늘은 낮이면 뿌옇게 흐려졌고, 밤이면 오히려 건물의 조명 때문에 밝게 빛났으며, 늘어난 인구만큼 자동차와 쓰레기도 늘어나게 됐다.

새로운 사람들의 이주와 함께 들이닥친 마을의 갑작스런 변화는 농부가 공들여 키워온 라즈베리들을 병들어 죽게 했다. 화가 난 농부는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으나, 새로운 사람들의 대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댁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새로운 도로와 집들을 만드는 건 모두 마을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항이니 다시 되돌리긴 어렵소… 그나저나 당신도 이 마을에 살고 있었소? 마을회의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은데….”

농부는 그제야 우스꽝스러운 제안을 했던 말끔한 정장차림의 남자가 떠올랐다.

앞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농부야말로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자신의 업무에 어쩔 수 없이 몰두해야 하는 상황과 그로 인해 주변의 중요한 변화를 놓치게 되는 우리들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빌딩이 높아지고 있고, 새로운 도로가 닦이고 있지만 우리는(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번 포럼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지역사회 갈등의 존재와 이 갈등을 풀어나가기 위한 거버넌스 측면이다. 분명 사회의 변화에 따라 늘 갈등은 발생한다. 갈등마다 규모와 영향력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갈등의 해결엔 늘 참여가 요구되는 점은 같을 것이다. 정반대의 입장이든 비슷한 듯 다른 입장이든,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진 사회 구성원의 참여가 보장될 때 갈등의 해결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참여의 중요함의 측면을 생각하면서 다시 앞의 이야기를 보자. 라즈베리를 재배하던 농부도 농부의 마을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도 모두 같은 지역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들을 마을회의를 통해 진행함에도 지역사회의 구성원인 농부는 참여하지 못 했다. 농부는 당시 지역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해, 결국 갈등의 발생을 인지조차 하지 못 했다.

과연 모든 구성원의 참여가 보장되지 못한 채 내려진 결론은 그 과정이 민주적이고 정당하다 할지라도 과연 공정한 갈등해결과 지역사회의 통합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자신의 참여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농부의 불찰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농부는 기존에도 마을회의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건 틀린 얘긴 아니지만, 이는 지역사회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참여로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을 자명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농부가 마을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말끔한 정장차림의 남자의 제안 때문이다. 그러나 농부는 그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격변하는 현대를 사는 우리도 넘쳐나는 정보 속에 사실여부를 채 가리지 못한 채 너무나도 쉽게 아무 정보에나 믿음을 갖게 된다. 바쁜 일로 인해 업무 이외의 것에는 깊이 관심을 갖지 못한다. 그렇게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 하고 갈등해결에서 배제된다. 이것을 계기로 우리 대부분은 농부와 같은 입장으로 자의로든 타의로든 참여를 망각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소개된 이래 공공분야와 민간분야 사이에 많은 협치가 이뤄지고 있다. 시민사회가 전문적이고 성숙해짐에 따라 공공행정 분야 역시 민주적이고 투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변화들 틈에 지역사회 구성원의 많은 참여가 보장되어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바라건대 앞으로의 거버넌스 발전에 중요한 과제는 참여를 망각해가는 우리를 다시 의사결정과 갈등해결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면 한다. 그 주체가 민간부분이든 공공부분이든 단순히 시민 스스로의 참여만을 외치는 단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민들이 참여를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스스로 참여해야하는 중요성을 알리고, 쉽고 정확한 정보를 능동적으로 전달하여 참여를 망각하지 않고 갈등해결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거버넌스를 통한 지역사회의 통합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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