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머스조약 113년 주년에 즈음하여

조선 관리들 조약 결과 제대로 예측 못해…2개월 뒤 을사늑약 체결

한반도 지정학적 지위는 113년 지난 지금도 크게 안 달라져

급변하는 정세 속 100년 이후 생각하는 큰 정치 펼쳐야

1905년 9월 5일 한반도운명이 결정되는 포츠머스 강화조약 현장사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화회담이라고 평가받는 이 회담의 희생양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었다. 지금도 그대로 보존, 전시되고 있다.

[평택시민신문]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의 한 호텔에서는 치욕의 조약이 체결된다. 사실상 조선의 멸망을 공식화한 포츠머스강화 조약. 그날 우리는 누구하나 그 현장에 없었고 조약 문장에 우리의 생각을 단 한 글자도 첨삭할 수 없었던 처지. 도대체 당시 조선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토록 초라한 지경이 되었던 것일까! 필자는 유구한 한반도 역사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그 현장을 포츠머스조약 113주년에 즈음해 군에서 제대한 아들과 함께 방문했다.

조약 체결 현장은 113년 전 모습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당시의 회의실 책상 가구 등 모든 것이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러·일 간의 조약 조인 사진은 국제관계의 냉혹함과 참혹한 역사의 무게를 보여주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사무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113년이 지난 2018년 9월 5일 강화조약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1853년 에도만 앞바다에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 흑선함대 4척이 나타난다. 은둔의 나라 일본이 역사의 회오리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이고 세계가 쑥대밭이 되는 태평양전쟁까지 10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1년 뒤 미일 불평등 수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본격적으로 풍랑 속으로 진입, 260년 에도막부가 멸망하고 1868년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선다.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조슈번(야마구치현)의 정한론자들이 득세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못 이룬 한반도 정복야욕을 다시 불태운다.

당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 일본의 근대 사상가 요시다 쇼인은 말한다. “한반도를 차지하지 않으면 일본도 서구의 식민지가 될 터이니 하루빨리 조선을 정복하라” 이에 제자 다가스키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회천(回天)을 이루기 위해 탈아입구(脫亞入歐), 일본을 완전히 뜯어 고친다.

군의 현대화를 통해 힘을 키운 그들은 자기들이 미국에 당한 그대로 조선과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정복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꾸미는 바 일단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을 맺는다. 그 조약 1조는 ‘조선은 독립국이다(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

이제는 러시아가 상대다. 가뜩이나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삼국간섭(러시아 독일 프랑스)으로 어쩔 수 없이 반환하여 이를 물고 복수를 준비한다.

뉴 햄프셔 주 포츠머스의 웬트워스 호텔. 113년 전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지금은 메리어트호텔 체인으로 하루 방값이 무려 500불 가까이 한다.

일본은 치밀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와 만주 및 조선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면서 뒤로는 미국과 영국을 회유하고 있었다. 1904년 2월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가 주둔하고 있는 여순 및 요동반도를 기습 공격한다. 일본 전사자 9만 여명, 러시아 전사자 7만 여명, 미국 신임장교 맥아더가 보는 앞에서 벌인 전쟁의 결과는 일본 3대 충신중 하나로 불리는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승리.

1905년 5월, 영국의 수에즈운하 통과 불허로 3만 여 킬로미터를 돌아온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한해협에서 쑥대밭 낸 쓰시마해전은 도고 헤이하치로 장군의 승리. 달아나는 돈스코이 함정(보물 150조가 실렸다는 배)을 울릉도까지 쫓아가 결국 선장은 승무원에게 하선 명령을 내린 후 배와 함께 장렬하게 수장되면서 러일전쟁은 종결된다.

그 강화조약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대통령에게 부탁, 미국 포츠머스항구에서 이루어지는데 일본은 교묘했다. 강화조약 두 달 전인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8월에는 제 2차 영일동맹을 맺는다. 가쓰라 태프트밀약에서는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대한제국을 지배하기로 합의하였고 영일동맹에서는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역시 조선을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러일전쟁의 강화조약. 한반도 지배를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쟁취하였듯이 러시아로부터도 받아내야만 했다. 포츠머스강화조약만 체결하면 조선은 누구하나 간섭할 자 없는 완벽한 시나리오의 완성.

113년 전 포츠머스 강화조약 현장을 방문한 필자. 호텔지배인에게 조약 체결 후 한반도의 운명을 설명했더니 몹시 놀란다. 한국인의 첫 방문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하버드대학 출신인 것을 알고서 강화조약 알선 전권을 일본 최초 하버드 법대 출신인 가네코 겐타로(법무부장관 역임)에게 맡긴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전제정치의 러시아가 싫었던 루스벨트는 때마침 맺어진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함께 일본 편으로 마음이 완전히 기울었다. 한 달간의 밀당 끝에 조약이 완성되었다. 그 조약 1조는 ‘조선에서 지배 우월권은 일본에 있다.’ 청나라 러시아 미국 영국 당시 모든 강국으로부터 조선지배의 승낙을 얻어낸 결정적인 조약이 완성된 것이다. 당시 모든 신문에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평화스러운 조약 이라고 칭송하였고 그는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거칠게 없게 된 일본, 2개월 뒤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사실상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5년 뒤인 경술국치는 단지 수순이었다. 그날 전국은 조용했고 자결하는 자 하나 없었다 한다. 체념의 극치였다.

113년 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으로 인해 보호국으로 전락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결국 사라졌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당시 구한말의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다. 양반은 무책임했고 백성은 무관심했다. 세금 내는 국민은 전 인구의 25% 내외, 농민은 토지를 경작해서 수확하면 양반은 백성을 경작삼아 수확했다. 숨 쉴 만큼만 남기고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마지막 한 톨 까지도 수탈했다. 정부가 아니고 강도였다. 간신만 들끓었다. 백성은 꿈도 잃고 재산도 잃었다. 고관대작과 양반은 세금 한 푼 안내고 호의호식하고 있었으니 꿈도 잃고 재산도 사라지는 오늘의 소상인과 의욕상실로 근근이 하루를 버티는 오늘 청년들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지.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 동아시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조약이었다. 이 조약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조선 관리는 아무도 예측하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과 서방세계가 보내는 시그널에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외교적인 난맥상이 가끔 보인다.

한반도 지정학적 위치는 영원히 달라질 수 없다. 지금도 일본 중국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고 아마 또다시 113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민족끼리’만 이라는 구호만 외치고 대한민국, 더 나아가 인류를 생각지 않는 우물안 외교와 진영 논리의 정치력으로는 주변 강대국과 동등한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역사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과거 정권 탓하지 말고 이제 생각을 키우자. 생각의 크기가 미래를 결정한다. 일본보다 크게 생각해보자. 100년이 아닌 1000년 이후를 생각하는 정치인을 가져보자.

113년 전의 굴욕이 이 땅에 두 번 다시 없어야하기에 하는 말이다.

 

 

글: 경영학 박사 최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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