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과 평택 6-② 주한미군 평택시대, 우리의 과제 _ 쫓겨나가길 거부한 사람들

[평택시민신문] 지난 2018년 7월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이전이 완료됐으며, 본격적인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평택시민신문>은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주한미군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사 차원의 주둔역사를 정립하고, 미군과의 바람직한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평택주둔 약사 및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책에는 평택의 각계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이 참여해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 역사와 미군주둔이 평택인의 생활과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더불어 주한미군 평택시대에 대처해야 할 지역사회의 과제 등 평택시민에게 주어진 미래의 과제를 살펴보는 내용도 담겼다.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점에 지역사 차원의 미군 주둔 역사를 이해하고, 한미양국의 이질감을 줄이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평택시민신문>은 해당 도서의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이번 글은 강상원 평택평화센터 활동가의 '주한미군 평택시대, 우리의 과제'를 싣는다.

 

 

대추초 행정대집행서 연행자 524명, 부상자 300명

 

3. 미군기지확장반대 운동

‘이 땅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원’

2001년 7월. 국방부는 주한미군이 제안한 연합토지관리계획(LPP)을 검토하고 협의하는 중이라고 발표하였다. 전국에 산재해있는 주한미군기지를 통폐합하여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지역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체결된 LPP협정은 2002년 10월 국회비준을 받았고, 이에 따라 평택지역에는 74만평(오산기지 인근 50만평, 캠프 험프리스 인근 24만평) 규모의 기지가 늘어날 상황이었다.

평택지역에 미군기지가 확장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2001년 11월. 평택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미군기지확장반대평택대책위원회(이하 평택대책위)’를 구성하고 환경운동차원에서 진행되어왔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미군기지확장반대 운동에 접목해 ‘미군기지 땅한 평사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오산기지 인근의 땅 2000.3㎡(약605평)를 1명이 1평씩 605명을 모집해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보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우여곡절 끝에 등기까지 마치게 된다.

평화의 논 표지판

그러던 중 2002년 11월 미국방부는 주한미군 재조정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기구 구성을 제안하였다. 2003년 4월 한미 간의 첫 회의를 연 이후 주한미군을 평택오산권, 대구부산권등 2개의 허브기지로 재편한다고 밝히면서 미 국방부는 팽성지역에 400만평을 확장해 미8군사령부와 미2사단을 이전하고, 평택오산미공군기지 주변에는 100여만평을 확장해 주한미군 사령부를 이전할 계획이라고 밝힌다. 이에 팽성읍 주민들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2003년 7월 29일(화) 팽성읍사무소에서 ‘미군기지확장반대팽성읍대책위원회(이하 팽성주민대책위)’를 발족한다. 팽성주민대책위는 팽성읍이장협의회를 필두로 새마을지도자회, 농촌지도자회, 농민회 등 지역 자치단체들이 총망라된다.

하지만 팽성주민대책위의 활동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미군기지 앞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업주들과 상인들은 미군기지가 확장되는 것을 반기는 분위기여서 팽성주민대책위 결성과정에 빠졌고,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한 주변 마을들도 점차 발을 빼기 시작해서 몇몇 이장들과 대추리 도두2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투쟁은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팽성주민대책위 깃발

2003년 11월 17일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가 열릴 것에 맞추어 10월 31일 평택역광장에서 팽성주민대책위와 평택대책위 주최로 ‘미군기지 평택총집결 저지 범국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평택시민들만이 참가한 것이 아니라 전국 단위의 주요단체들까지 망라하면서 전국적인 사안으로 부상되기 시작했다.

팽성주민대책위는 황새울 영농단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고, 주민들은 교대로 농성을 진행하면서 그 겨울을 천막에서 보내야했다.

결국 주민들의 반대와 사회적 우려를 묵살하고 용산기지와 미2사단이전을 전제로 한 이전협정이 비준되고 말았다.

2004년 9월 1일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이날 오후 1시30분부터 평택대학교에서 ‘주한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시 등의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 공청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공청회가 열리기전 주민들은 ‘주민과 협의 없는 특별법안은 무효이며 미군기지로는 단 한 평도 내줄 수 없다’는 재천명했다.

주민들은 이 공청회가 미군기지이전을 기정사실화하고, 특별법을 성사시키기 위한 요식행위에 다름 아님을 알고 있었다. 평택대학교 곳곳에는 경찰이 늘어서 긴장감은 더욱 높아갔다. 공청회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청회는 강행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향해 공청회 종료를 선언하고, 주민들에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공청회는 성사된 것으로 선포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김지태 위원장을 비롯해 평택대책위 회원들이 연행되었고,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평택경찰서를 항의 방문한다. 해가 저문 후에도 석방되지 않자 하나둘 촛불을 들게 되고, 이렇게 시작한 촛불집회가 935일간 지속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주민들의 항의로 연행자가 석방되었고 이 자리에서 김지태 위원장은 “구속되는 한이 있더라도 미군기지 확장이전을 막을 것”이라며 의지를 밝혔다.

다음날 저녁에도 본정리 농협 앞 공터에 300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촛불집회의 힘으로 연행자가 석방되자 이제는 ‘미군기지확장반대’를 요구로 촛불을 들기로 한 것이다.

국방부와 미군 측 관계자가 공여지역을 돌아다니며 표시목을 박기 시작하자 팽성주민대책위는 번갈아 순찰을 돌며 외부인의 마을 출입을 단속하고 나섰다. 12월 9일 미군기지이전협정이 국회를 통과하자 정부의 토지취득, 수용절차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부는 기지확장지역에 있는 토지와 건물, 공작물, 시설, 입죽목, 농작물 등 물건을 조사하여 사업실시 계획을 승인받아 이를 고시하고 매수 절차에 들어간다. 토지와 물건의 주인과 협의매수를 진행하지만 소유자가 협의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정부는 법에 따라 강제로 수용하여 보상금을 법원에 공탁한 후 소유권을 박탈할 수 있다면서 협의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의 토지 등을 중앙토지수용위원회의 결정을 받아 소유권을 빼앗고 만다. 이 시기 최고의 긴장을 겪게 된다.

2006년은 트랙터순례로 시작한다. 전국을 돌며 미군기지확장반대운동을 알려내자는 취지였고, 20여개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평택의 아픔을 전했다. 봄이 가까워지자 정부는 이제 이 토지는 당신들의 소유가 아니니 농사를 짓지 말라면서 펼침막을 세우고, 경고장을 발송한다. 주민들이 이를 무시하고 영농준비에 들어가자 국방부는 포클레인을 동원해 농수로의 물을 차단하고 전국에서 모여든 500여대의 트랙터를 도로 곳곳에서 막아 세웠다. 그럼에도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전체 영농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너른땅을 갈았다. 중장비로 훼손된 농수로를 삽과 곡괭이로 메웠다. 국방부는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추분교부터 접수하겠다며 ‘점유사용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평택지원은 국방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3월 2일 대추분교에 대한 행정대집행을 진행하려 했지만 주민들의 저항으로 무산되고, 연이은 행정대집행에 온몸을 쇠사슬로 정문에 묶고 저항했다. 농수로를 파괴하는 행위에 맞서 포클레인 위에 올라가 평화적 저항을 했다.

부안 핵폐기장 설치에 좌절을 경험했던 정부는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며 5월 4일 ‘여명의 황새울’ 작전을 단행하게 된다. 이른 새벽, 안성천엔 부교가 띄워지고 하늘에는 철조망을 매단 헬리콥터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대추리, 도두리로는 끝이 안 보이는 경찰병력이 몰려들었다. 전날부터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밤을 샌 시민들은 경찰과 군대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토끼몰이를 당해야 했다.

연행자 524명, 부상자 300명. 행정대집행이 단행되면서 대추초등학교 지붕위에 올라 저항했던 문정현 신부와 성직자, 진보정당 관계자들은 연행된 사람들의 전원석방을 약속받고 내려오고, 기다렸다는 듯 경찰에 둘러싸인 대추초등학교는 포클레인의 삽날에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논과 밭으로 향하던 농로와 수로엔 원형철조망이 쳐지고, 마을곳곳에서 군인들과 경찰에 의한 무자비한 폭력이 계속되었다. 마을로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였고 동네 주민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발길을 돌려야했다.

마을과 외부가 완벽히 차단되고, 마음의 고향이었던 대추초등학교의 처참한 모습과 자식 같던 논과 밭에 가시철조망이 드리워진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주민들은 결국 2007년 1월 이주단지, 생계지원 등을 약속받고 이주에 합의하게 된다.

2006.5.4. 행정대집행이 단행된 이후 무너지는 대추초등학교

3월 25일. 마을을 지키던 문‧무인상을 하늘로 태워 보내고,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끝으로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온다.

마을을 떠나온 주민들은 대추리에서 7km떨어진 노와리에 이주단지를 조성한다. 대추리지명사용을 약속했던 정부는 말을 바꿔 거부했다. 국책사업이라는 허울로 국민의 평화적 생존권을 박탈한 그 아픔을 후대에 알리고,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대추리주민역사관’을 만들었다.

 

글:강상원 평택평화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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