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아픔은 유럽의 해양 팽창시대와 궤를 같이한다

‘잊지 않겠지만 용서하겠다’

대 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대 발견 기념비.(리스본 근교 소재) 엔리케 왕자 사후 500년을 기념해 세운 것으로 높이가 170피트나 된다. 엔리케 왕자를 선두로 해서 바스코 다 가마,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마젤란 등 당시의 천문학자, 지리학자 등이 묘사돼 있다.

[평택시민신문] 레콩키스타가 완성되어가면서 이베리아 반도는 부유한 유대인의 손길이 필요 없어지게 되고 순결한 가톨릭 왕국을 꿈꾼다. 또한 유대인에게 본격적으로 개종을 요구하면서 스페인은 기독교원리주의자로 돌아가고자 했다.

유대인의 크나 큰 재력과 인맥은 그리스시대를 포함, 로마 페니키아 이베리아까지 수천 년 간 이동을 거듭하면서 화려하게 세계의 중심을 만들었지만 돈만 아는 그들의 행태가 미워 핍박을(이산, 디아스포라) 가하니 유대인(JEWS)은 보석(JEWERLY)만 갖고 그 지역을 떠나게 되고 떠난 지역은 쇠락을 맞이하게 된다.

이베리아반도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의 항해의 왕자 엔리케는 몸이 달았다. 황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 시장의 개척을 위한 신항로가 절대 급선무였다. 오늘날에도 세계 금융자산의 70%를 갖고 있는 그들의 빈자리가 매우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시바의 여왕 때 아프리카는 지중해와 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이슬람에 의해 아프리카와 유럽이 분리되면서 중세에 들어서자 아프리카에 대해 그동안 쌓아왔던 많은 지식을 잃게 된다. 또한 이슬람세력에 의해 동서의 길마저 막혀 있어 새로운 루트를 찾아야하는 절박한 시기이기에 엔리케왕자는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동방으로 가는 바닷길을 열어라”

엔리케 사후, 1488년 디아스는 ‘고통 끝 행복 시작’의 염원을 담은 ‘Cape of Good Hope’ 희망봉을 찾아낸다. 곧이어 스페인은 이사벨라여왕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고 비슷한 시기인 1498년, 바스코 다가마는 드디어 인도 고야에 도착한다. 아프리카 수난을 의미하는 최남단 케이프 포인트가 열린 것이다.

개종을 거부하고 스페인에서 쫒겨난 유대인은 네덜란드와 영국에 정착한다. 재정이 풍부해진 네덜란드는 종교 등의 이유로 아프리카 남단에 손을 뻗쳤다. 곧이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민이 시작되고 네덜란드어에서 파생된 독특한 아프리칸스어가 생겨났다.

한편, 영국군의 지원으로 우월한 위치에 선 영국인으로 인해 네덜란드인들은 불만이 많아졌다. 특히 노예해방조치를 내리자 하나 둘씩 케이프 북쪽으로 이주, 농장을 설립한다. 이들을 가르켜 네덜란드어로 농장주를 뜻하는 보어인이라 부르게 된다. 이들은 원주민을 정복하고 나탈리아 공화국을 수립하지만 곧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된다. 불만을 가진 보어인은 북쪽으로 또다시 이주, 지금의 요하네스부근에 트란스발 공화국(1852년)과 오렌지 자유국(1854년)을 세우지만 두 곳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욕심 많은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이권다툼이 시작된다. 이 전쟁이 바로 보어전쟁이다.(1899-1902)

승리한 영국은 케이프식민지, 트란스발공화국, 오렌지공화국을 묶어 남아프리카 연방을 수립한다. 식민지 정부는 대규모 이민이 뒤따르자 백인국가를 세우고자 시도하는바 원주민을 쫒아내고 백인국가를 세운 미국 호주 뉴질랜드를 그리면서 그들의 꿈이 이루어 질 것이다라고 확신을 했을 것이다.

해양팽창시대 당시 남미로의 이주는 정복자 신분으로 주로 남자들만 이주를 했다. 깡패들만 건너온 남미는 현지 처녀들을 성적 노예로 삼아 메스티조라는 혼혈을 만들어 냈고 그들은 주요인종이 되니 ‘남미는 스페인의 대포가 아니라 스페인 남성의 정력으로 점령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북미와 케이프는 남미와 달리 가족이 함께 이주를 하였기에 그들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백인국가가 절대 필요했다.

한편, 믿었던 종주국 영국마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를 반대하니 남아연방은 1961년 영국령에서 벗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독립한다. 독립 후에도 인종차별 정책을 유지, 세계로부터 지탄을 받아왔으나 1990년 최초로 이루어진 총선에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밝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넬슨 만델라는 1965년, 체 게바라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넬슨 만델라! 아파르트 헤이트 폐지를 목표로 무력을 수단으로 선택한 군대조직의 책임자가 만델라였다. 그는 카스트로와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무장투쟁을 계획한 강경파였고 콩고독립전쟁에 참가한 ‘체 게바라’와 1965년 역사적인 만남을 갖으며 인종분리정책의 부당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44세에 종신형을 받고 27년간 케이프타운 항구 앞 로벤섬에서 감금된 채 생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는 만델라는 72세에 사회에 나오면서 첫 일성을 발표한다.

‘잊지 않겠지만 용서하겠다’

*레콩키스타:AD711~1492년까지 780년동안 에스파냐의 그리스도 교도가 이슬람 교도에 대하여 벌인 영토 회복 운동

테이블마운틴에서 바라본 케이프타운의 전경. 라이온스헤드와 멀리 넬슨 만델라가 27년간 갇혀있던 로벤섬이 보인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의 희망봉.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발견한다.
지구 반대 편 케이프 포인트에서 한 컷. 모두 평택에서 오신 분이다.
주로 추운 곳에서 살아가는 펭귄이 케이프에도 집단 서식한다. 역시 입장료가 비싸다.

 

글: 경영학박사 최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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