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과 평택 9-② 미군기지와 기지촌에서의 삶 (K-6)

[평택시민신문] 지난 2018년 7월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이전이 완료됐으며, 본격적인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평택시민신문>은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주한미군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사 차원의 주둔역사를 정립하고, 미군과의 바람직한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평택주둔 약사 및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책에는 평택의 각계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이 참여해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 역사와 미군주둔이 평택인의 생활과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더불어 주한미군 평택시대에 대처해야 할 지역사회의 과제 등 평택시민에게 주어진 미래의 과제를 살펴보는 내용도 담겼다.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점에 지역사 차원의 미군 주둔 역사를 이해하고, 한미양국의 이질감을 줄이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평택시민신문>은 해당 도서의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이번 글은 연재의 마지막으로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의 '미군기지와 기지촌에서의 삶'을 싣는다.

 

 

3. K-6캠프험프리즈 기지촌

(1)기지촌의 형성과 구조

팽성읍에 본격적으로 외국군이 주둔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K-6캠프험프리즈 홈페이지에 따르면 1919년부터 일본군이 안정리, 함정리 일대에 기지를 건설하고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2년에는 일본해군시설대(302부대)가 비행장을 건설했다. 해방 후 일본군이 건설한 비행장은 미군이 접수했다가 1949년부터는 한국군이 관리했다. 이곳에 6.25전쟁 중인 1952년 K-6캠프험프리즈가 주둔했다.

K-6캠프험프리즈의 정문은 초기 만해도 팽성읍 본정2리에 있었다. 미군기지 정문이 세워지자 일대에는 상가와 주택이 들어섰고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은 본정2리의 주변마을인 함정1리와 두정2리까지 확산되었고 도두리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때문에 피해가 크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K-6캠프험프리즈 기지사령관에게 진정서를 내어 기지정문을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안정리 쪽으로 정문이 이전했고 안정2리 일곱집매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60~70년 대 미군기지촌은 기회의 땅, 수 많은 사람 모여들어

70~80년 대는 미군클럽 전성시대, 16개 클럽 문전성시 이뤄

 

미군기지가 건설되기 전 안정리에는 안현, 서정자, 일곱집매 같은 마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안정2리 서정자마을은 미군기지에 수용되어 고향을 잃었다. 고향을 잃게 되면서 서정자 주민들은 근처 일곱집매나 안정1리 길마재 또는 송화3리 큰말로 흩어졌다.

경기침체로 급격히 쇠퇴한 가구골목
로데오거리의 크라운환전소
일곱집매 앞에 형성된 로데오거리 수정약국 앞

K-6캠프험프리즈 구정문 앞 일곱집매 일대의 기지촌은 상가가 중심이었고, 주변의 구릉지대와 논밭에는 판자촌(하꼬방촌)이 형성되었다. 하꼬방은 서정자 마을 동쪽 소당산 기슭에도 있었다. 상가들은 구정문에서 로데오거리의 수정약국까지 약 150m 사이에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하꼬방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지붕이 낮은 한옥들로 바뀌었다. 기지촌 상가의 주 고객은 미군이었다. 그래서 철저히 미군들의 유흥과 기호에 맞게 세팅되었다. 현재 로데오거리라고 명명된 골목 좌측에는 미군전용의 클럽골목이 형성되었다. 안정3리로 올라가는 능선에는 미군들과 동거하는 여성들을 위해 가구점골목이 형성되었다. 로데오거리에는 양복점, 금은방, 사진관, 미제물건을 취급하는 잡화점, 환전상이 자리 잡았다. 현재 안정5리, 6리 방향으로는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한국인과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과 선술집이 몇 집 있었다.

1960, 70년대만 해도‘기지촌 드림’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지지리도 가난했고 변변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미군기지촌은 직장을 얻고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전쟁피난민들에게도, 농촌의 가난한 여성들에게도 기지촌은 생존과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기지촌은 미국이민을 꿈꾸는 도시 여성들에게는 미군과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와 기회를 얻기 위해 안정리 기지촌으로 몰려들었다.

기지촌은 각자의 직업에 따라 역할에 따라 거주지가 구분되었다.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기지와 가까운 안정1리 안현마을과 송화3리 큰말에 거주했다. 미군기지에서 허드렛일이나 노무자로 일하던 사람들, 기지촌여성들, 일부 상인들은 주로 안정2리에서 3리, 4리로 넘어가는 시온성교회 일대의 구릉지대에 거주했다. 7리는 한국전쟁 뒤에 건설된 ‘피난민수용소’였다. 이렇게 확장되는 가운데 초기만 해도 안정1리, 2리 두 개 마을뿐이었던 곳이 1960, 70년대 활황기를 거치며 12개 마을로 확대되었다.

안정2리 클럽골목

(2)안정리 기지촌에서의 삶

기지촌은 6.25전쟁 뒤 기회와 생존을 위해 급조된 마을이다. 그러다보니 도시기반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안정리 기지촌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도로와 대중교통뿐이었다. 안정리에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정문에서 객사리로 나가는 도로가 하나밖에 없었다. 비포장도로는 비가 내리면 매우 질퍽했고 평소에는 먼지가 많이 났다. 이곳으로 미군트럭이 지나고 16인승 미니버스가 운행되었다. 주민들과 미군들은 평택시내로 나갈 때 미니버스를 타고 다녔다. 1960, 70년대만 해도 주택난도 심각했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방세가 쌀 한 말에 180원 할 때 800원에 달했는데도 집을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방이 귀하다보니 대부분의 집들은 직사각형 건물에 방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개미집 형태가 많았다.

주둔 초기 K-6캠프험프리즈 정문 앞 기지촌 본정2리 아리랑고개

기지촌의 생활환경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신정문을 중심으로 북동쪽으로 곧게 뻗은 6차선 포장도로가 건설되면서부터다. 시내버스도 크게 증차되었다. 9.11테러뒤에는 기지 주변으로 담장을 쌓았고 로데오거리가 정비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기지촌은 식수문제로 큰 고통을 겪었다. 식수는 우물이나 관정을 박아 펌프를 설치해서 얻었는데 좋은 물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었다.

클럽골목 내 세븐클럽

1973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군은 징병제였다. 그래서 시민권을 가진 모든 미국 남성들은 일정기간 군대에 복무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1973년 이전의 미군들은 학력수준이 높았고 돈의 씀씀이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컸다. 당시 기지촌 상업의 번창은 미군들의 소비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지촌에서는 미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팔았다. 주로 판매되는 상품들은 미군들의 유흥과 관련된 사치품이나 귀국할 때 가져갈 기념품 이 많았다. 미군들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을 주 고객으로 가구점이 성업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미군전용클럽은 클럽골목에 밀집되었지만 일부는 로데오거리에도 있었고 규모가 컸던 맥심클럽은 길 건너 안정10리에 있었다. 1960, 70년대 미군클럽은 교통부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개업할 수 있었고 종업원들도 공식적인 허가증이 있어야 일할 수 있었다. 이것은 미군들의 안전을 위한 주한미군의 요청이었고 한국정부의 대처였다. 가장 많을 때 미군클럽은 16개나 되었다. 미군클럽에는 흑인클럽과 백인클럽의 구분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흑백갈등이 심해서 흑인과 백인 사이에 난투극을 벌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미군클럽의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 80년대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클럽은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술은 주로 맥주와 양주를 팔았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군들은 돈이 많아서 양주도 많이 마셨다. 곁에 기지촌여성(미군위안부)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양주를 마셨다. 기지촌여성(미군위안부)은 전성기 때는 한 개의 클럽에 약 150여 명 내외의 여성들이 일했고, 1970년대는 등록여성 1500명, 미등록여성 400여 명 등 2000여 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일했다. 이들 기지촌여성들(미군위안부)은 정부의 관리를 받았다. 이들은 클럽에 등록하고 보건소 정기검진을 받아야만 공식 활동이 보장되었다. 혹여 성병이라도 걸리면 클럽 기도들이 데리고 다니며 치료했고 보건소에 일정기간 갇혀 치료받기도 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꿈은 미군과 국제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지촌에는 국제결혼을 원하는 여성들의 업무를 대행하는 업체들이 많았다. 혼혈아들도 대부분 입양 했다.

미군기지촌에서는 군표(軍票)가 화폐로 통용되었다. 군표는 해방 후 맥아더사령부가 달러의 해외유출을 막기 위해 달러지급보증용인 군표를 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군표는 원칙적으로 미군기지 영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안정리나 송탄, 이태원, 동두천같이 미군기지촌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화폐가치로는 달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미군기지의 사정에 따라 급작스럽게 바뀌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기지촌 상인들은 미군기지 내 사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군표는 1973년 미군기지 사정으로 사용이 중단되었다.

안정리기지촌의 상업은 2000년대로 접어들며 시들해졌다. 미군감축과 모병제가 실시되면서 미국 내에서도 가난한 병사들의 장기 복무하는 사례가 늘었다. 2000년 9.11테러 이후 미군기지 담장이 높아지고 미군들의 외출이 제한된 것도 어려움이다. 기지촌의 가외수입원이었던 속칭 ‘미제물건’들도 이제는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부 주민들은 근래 미군클럽들이 값이 싼 외국인 여성들을 고용하는 것도 경기후퇴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글: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 연재기사 종료안내-

그동안 ‘주한미군과 평택’ 연재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주한미군은 평택을 규정짓는 주요한 요소입니다. 앞으로도 깊이 있는 기획기사를 통해 ‘주한미군과 평택’이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작업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여러분들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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