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섭
전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회장

[평택시민신문] 평택이 낳은 조선시대 뛰어난 구국 명장 원균 장군 순국 제422주기 제향 및 추모문화제가 8월 15일 도일동 원릉군기념관에서 열린다.

원릉군기념관에는 원균 장군의 생애와 가계, 선무공신 교서와 치제문, 판옥선 등 당시의 전함과 병기 전승기록이 전시되어 있고 장군의 일생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원균 장군은 1540년에 이곳 도일동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 부령부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개월 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연합수군을 편성하여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왜선 30여척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둔다. 그 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등 4년 6개월 동안 36회에 걸친 해전에서 승전하였으나,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순국하였다. 7년 후 1604년에 원균 장군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 공신에 책록되고 원릉군에 봉해졌다.

하지만 이후 400년 역사에서 원균은 겁장으로 방탕하고 무능하며 공만 탐하고 이순신을 모함하는 등 실패한 장군으로 묘사되어 왔다. 이와 같은 폄훼는 정치권력이 만든 왜곡으로 원균 장군의 실제모습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어왔다. 이제는 구국 명장 원균 장군에 대한 역사 왜곡을 넘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 원균 그는 왜 역사적인 목적에 이용당하였으며, 정치적 효용을 위해 왜곡되었는지 그리고 그동안 원균 장군을 둘러싼 수많은 억측과 오해를 풀어야 한다.

‘진실이 아니면 역사가 아니다’. 임진왜란 7년의 내력을 정확하게 기록한 ‘선조실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45년이 지난 후 ‘선조수정실록’ 이 편찬되었다. 이 기록에는 많은 허점들이 보이는데 여기서의 잘못된 기록으로 인해 원균 장군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본다.

원균 장군이 순국한지 8년 후 1605년에 선조임금은 치제문에서 “왜군이 침략하여 나라의 운명이 극에 달했는데 오직 장군만이 용기를 내고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우리 군신들을 격려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방비하고 바다에 나가 싸우니 달마다 승전보를 올렸도다. 우리의 바다를 보장함은 장군이 아니고 누구를 의지하리오.”라고 하였다. 이어 “내가 그 빛나는 공훈을 가상히 생각하여 특별히 승급을 시켰는데, 적이 재차 침범함에 힘을 다하여 맞아 싸워서 승승장구하다가 매복한 적이 엄습하여 불우의 변을 당하니 이는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아니함이로다. 한번 패함에 지탱하지 못하니 장군의 죽음은 나의 박덕함에 인함이로다. 장군의 웅도가 영영사라지고 장엄한 계략을 펴지 못하니 자나 깨나 가슴을 치는 탄식이 그치지 아니하고 피로써 충성을 맹세함에 뒤에 알려지니 더욱 슬픔이 간절하도다.”라고 원균 장군을 추모하였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라고 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를 읽고 미래창조의 지혜를 배운다. 역사는 수많은 위인들의 활동이 우리에게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생생한 삶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남해바다를 누비며 최초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승리의 주역인 원균 장군에 대해 인식변화와 함께 재조명이 필요한 때다. 올바른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과거의 잘못된 사실을 밝히고 바로잡아 후대에 전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임을 원균 장군 순국 제422주기를 앞두고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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