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일제 강점기 14회 국내외 답사··· 기록 남겨

그의 답사는 민족 자존심 찾고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
무등산은 항일과 민주화 운동 중심 도시 광주의 상징
민세의 무등산 답사 90주년 맞아 현재적 의미 재조명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평택시민신문] 우리 고장 평택출신의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은 조선일보 부사장 시절인 1929년 9월 26일∼ 27일 이틀간 광주와 무등산 일대를 답사하고 10월 6일부터 13일까지 조선일보에 답사기를  연재했다. 민세는 첫째 날인 26일에는 수피아여고와 광주공원을 다녀왔다. 저녁에는 2.8 독립선언을 주도했고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석초 최원순, 일본 유학시절 동창이자 당시 호남 최대의 갑부로 호남은행을 설립한 무송 현준호(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의 조부)와 호남은행에 함께 근무했던 김신석(홍라희 전 삼성미술관장 조부) 등과 함께 만났다. 

27일에는 무등산 증심사- 서석대-규봉암 코스로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민세는 일제강점기 14회에 걸친 국내외 답사를 다녀오고 관련 기록을 남겼다. 광주 답사후 불과 2개월 지난 11월 3일 이곳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민세는 신간회의 광주학생운동 진상대회 보고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른다. 그의 국내외 답사는 한사(閑事)가 아니요 민족의 자존심을 찾고 지키고 알리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광주 무등산 기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세 무등산행 90주년을 맞아 그가 다녀왔던 길을 따라 5회에 걸쳐 그 현재적 의미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광주천변에서 바라본 광주 무등산

항일과 민주화의 상징 도시 광주의 희망 무등산 

광주의 상징은 무등산이다. 광주사람들에게 무등산은 평등의 세상, 차별이 없는 세계의 염원을 담은 희망 그 자체를 뜻한다. 이런 광주 사람들의 결기는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로 민족독립의 뜻을 널리 알렸다. 1980년 5월 광주는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전시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피로써 광주정신의 가치를 전세계에 알리며 대한민국 민주화의 불꽃으로 다시 피어났다. 그 역사적 상징 공간인 옛 전남도청은 이제 5.18민주화운동기념 공간으로 탈바꿈해서 그 뜨거운 민주화의 기억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항일운동의 인연으로 안재홍에게도 친숙했던 광주와 광주사람들 

안재홍은 100년 전인 1919년 11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첫 옥고를 치르고 3년간 대구 감옥에서 복역한다. 이 때 수많은 광주의 청년들이 만기가 되어 작별할 때 조국 광복의 봄을 함께 이루자는 시를 지어 구음으로 불러주곤 했다. 그의 광주방문기는 이에 대한 회고로 시작한다.

당시 씩씩하게 작별하던 수의 입은 동무들이 이 땅에 십수인이 넘고 전후에 친구가 적지 않으므로 이 땅이 나에게는 언제나 친숙미가 있다. 광주행을 할 기회도 여러 번 있었으나 쓸데없이 바빠서 못 왔었고 이번이 처음이다. 

의연한 호남의 대표 도시 광주에서 느낀 일제 경제 착취의 현실 

민세는 첫날 광주지국장 김창선과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이 곳 출신 석초 최원순과 함께 광주시내를 둘러본다. 민세가 답사할 당시 광주 인구는 5천호에 2만 4천명 인구 규모였다. 서울, 대구를 제외하고는 남쪽 지방에서는 3위의 도시였다. 그가 본 광주는 분명 호남의 대표도시였다. 그러나 내지 일본인의 이주가 늘고 경제적 착취가 늘어나는 현실에 우려도 표하고 있다. 

(광주는) 10만 인구의 평양과도 백중을 다투는 정세이다. 어떻든 광주는 의연한 호남웅번(湖南雄藩)이다. 그런데 일본인의 인구가 1천호에 4천인에 달하여 그네들이 각 방면에 진출하는 사정은 새삼스러이 말할 것이 없다. 이 사이는 종연방적의 분공장을 이곳에 두고 호남의 면화를 농단할 것도 멀지 않으리라 한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수피아여고 내 수피아홀

독교 선교사의 땀으로 세운 광주 여성교육의 산실, 수피아여고

민세가 이 날 처음 방문한 곳은 양림동에 있는 수피아여고였다. 1929년 당시 조선일보사 등 언론사에서 주관하는 여학교와 여성들의 수예물품을 전시 판매하는 전국 규모 바자회 참여에 대한 감사방문의 뜻도 담고 있었다. 광주 사직공원 아래 현재 남구 양림동은 이 시기 광주의 중심지였고 특히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교육기관이 이 곳에 많이 있었다.
서양인촌으로 별천지를 이룬 양림(楊林)을 지나 연합바자회로 우의 관계에 있는 수피아여고를 찾으니 교사와 기숙사를 아울러 몇 채나 되는 양관(洋館)은 꼭 광주의 이화학교이다. 교장 커밍씨가 친절히 향도해 줌으로써 각과 교실을 일주하고..

수피아여고 교사로  민세와 함께 1919년 수난을 당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1919년 민세와 함께 수난 당한 김마리아 선생도 수피아학교 교사로 활동

광주 여성교육의 요람 수피아여고는 1908년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Dr. Eugene Bell) 박사가 설립했다. 1919년 기미 만세 독립 운동에 전교생이 선봉으로 참가했으며 교사 2명과 학생 21명 등 23명이 투옥되어 옥고를 치뤘다. 1929년 광주 학생 독립 운동에도 적극 참가했으며 1937년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했던 항일운동의 성지이다. 1919년 옥고로 민세와도 인연이 깊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이 이 곳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던 곳이다.

1919년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수피아의 교사와 학생들

1929년 광주 방문 당시 민세가 만났던 다니엘 커밍 교장 (1892~1971)

안재홍이 방문했을 당시도 있었던 수피아홀은 1911년 건립되었으며 미국 스턴스 여사가 세상을 떠난 친정 동생을 추모하기 위해 기증한 5천불로 세운 건물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 곳은 광주지역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이자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꼽히는 수피아학교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이곳은 1919년 3월 10일 김마리아가 이 곳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역사적 장소이다. 김마리아는 1919년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애국부인회 사건으로 민세 안재홍과 함께 대구 감옥에 투옥 수난을 당하며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투지를 불태웠던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다음호 계속)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