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규 소장 
평택지역문화연구소

[평택시민신문] 예수는 ‘세상에 불을 끄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했다. 그이의 삶은 잃어버린 야훼신앙을 되살리고 관념에 사로잡힌 우리의 시선을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게 했다. 정태춘이 그랬다. 음악의 길로 들어서고 기타를 잡고 노래를 시작한 이래 그는 자신과 싸우고 시대와 불화하며 푯대를 향해 나아갔다.

정태춘의 고향마을 후배로 시인 박후기가 있다. 박후기의 초기 시(詩)에는 청소년기의 방황, 그 속에서 봤던 미군기지와 미군기지촌 그리고 고향 도두리가 있다. 정태춘도 그랬다. 그는 20대 초반 지독히도 방황했다. 고향집 사랑방은 방황의 아지트였다. 한뼘밖에 안 되는 골방에 쳐 박혀 친구들과 삶과 인생을 이야기했고 때론 떠돌며 혹독한 세상을 체험했다. 그렇게 체득된 삶이 1979년 초에 발매된 1집 앨범에 고스란히 담겼다.

올해는 그가 1집 앨범을 발매한지 만 40년이 되는 해이다. ‘시인의 마을’, ‘촛불’로 대별되는 1집 앨범은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명반이다. 필자도 고등학교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태춘의 노래에 깊이 빠졌다. 필자가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정태춘은 박은옥과 결혼하고 함께 2, 3집 음반을 냈지만 나는 접할 기회가 없었다. 전역 후에는 대학가를 풍미한 운동가요에 묻혀 살았다. 그러다가 친구 집에서 ‘떠나가는 배’와 ‘봉숭아’를 접하고는 ‘역시 정태춘이지!’라고 무릎을 쳤다. 박은옥이 청아한 음색으로 부른 봉숭아는 절창이었다. 그것은 내 어릴 적 고향 정서와 함께 클로즈업되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음반으로만 만났던 정태춘을 다시 만난 건 1980년대 후반 민주화투쟁의 현장에서다. 그는 더 이상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을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 서정성만 자극하는 염세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노래는 더 이상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87년 6월 항쟁 뒤에는 가요사전심의철폐운동에 앞장섰다. 아직도 내 주요 소장품 가운데 하나인 ‘19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당시 발매된 불법음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한 평택은 정태춘의 고향이었다. 사실 오랫동안 그걸 모르고 살았다. 2000년대 초반 지역신문 기자를 하던 후배가 정태춘씨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가 고향 도두리를 방문해서 촬영을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났다. 함께 밥을 먹고 그의 친구들과 ‘KBS 여섯 시 내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을 촬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때의 인연으로 대추리 미군기지반대투쟁에 동참했다. 정태춘이 주도한 ‘들 사람들’이라는 문화예술인 연대에도 이름을 걸었다. 하지만 교사라는 부자유스런 직업을 핑계 삼아 처절하게 싸우지는 못했다. 그게 오랫동안 짐이 되고 부채가 되었다.

‘정태춘 박은옥 스페이스40’이라는 주제로 데뷔 40주년 순회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KBS의 ‘열린 음악회’와 ‘불후의 명곡’에서도 특집방송을 했다. 평택시민들도 전세버스를 대절해서 서울 공연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쪽에서는 평택에서도 그들 부부를 초청해 공연해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총대를 메려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고등학교 동창 최치선과 영농조합법인 ‘미듬’의 전대경 대표가 나섰다. 그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지난 8월 28일 ‘정태춘 박은옥 스페이스40@평택’ 전시 및 공연이 성사되었다.

정태춘이 내 안부를 궁금해 했다는 말을 듣고 가슴 설레었다. 12년이 지났는데도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팬심이 작동했다. 학교가 끝난 뒤 서둘러 오성들로 향했다. 정태춘·박은옥은 이날 오후 평택시립 배다리도서관에서 1차 전시 및 공연을 하고 허허벌판 오성들 중앙의 ‘푸른 바람이 부는 곳’에서 저녁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옥상에 차려진 야외공연장은 단출했지만 그렇다고 추(醜)하지도 않았다. 옥상 빈 공간을 적절하게 채운 관중, 노을이 지는 들판, 기타를 든 가객(歌客) 그리고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시인의 마을’, ‘북한강에서’, ‘떠나가는 배’, ‘사랑하는 이에게.’ 정태춘은 1980년대 이후 자신의 싸움 결과를 ‘패배자’라고 표현했다. 도대체 그렇게 싸웠으면 뭐라도 변해야 하는데 ‘세상은 도무지 변한 것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66세라는 나이가 변혁의 최전선에 서기에는 너무 많다는 사실도 시인했다. 그럼에도 이번 ‘정태춘 박은옥 스페이스40’ 기념공연을 하며 느낀 것은 자신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대중들은 아직도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노래로 삶의 위로와 힘을 얻는 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정태춘, 우리시대의 가객(歌客)

우리는 그가 패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가 건너온 강이 결코 좁지도 의미 없지도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설령 그가 패배를 고통스러워할지라도 그것은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몸부림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만 옳으면 한 때의 고통은 산고(産苦)라는 사실을 안다. 필자는 오랫동안 도두리 도장산 위에 정태춘의 노래비를 세우고 싶었다. 그의 정서가 영글고 사상이 자란 도두리벌, 선말산, 아리랑고개, 보리원과 흑무개들에 노래의 유허를 남기고 싶은 욕망도 있다. 옛집을 매입해서 작은 기념관이라도 만들어 평택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싶은 꿈도 있다. 그가 꿈꿨던 세상, 그가 이루고 싶었던 일들이 평택시민들의 잠든 영혼을 깨우고 아이들에게는 깊은 영감과 울림을 줄 것이라 기대하기에. (2019.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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