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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주년 3.1절 및 민세 안재홍 선생 서세 55주기 기획취재 ④

기사승인 2020.03.18  16: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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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홍과 함께 한 평택의 독립운동가 수송 이조헌 선생 ④

국내외 독립자금 지원과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민족 사랑 실천 
<중어대전> 발간으로 중국어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 인재양성 토대 마련

[평택시민신문]

이조헌 선생 (1900~1933)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이조헌

3.1운동 100년이 되는 2019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늦게나마 수송(秀松) 이조헌 선생(1900∼1933) 등 평택출신의 독립운동가 9명에게 건국훈장을 포상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지식인들이 민족을 배반하거나 개인의 안위를 위해 친일의 길을 택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개인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기어이 독립의 그날을 맞이 했다. 비록 남북 분단의 아픔을 겪었지만 단군 이래 최대로 부강한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의 성취도 이들 독립운동가들의 비원과 실천에 힘입은 바가 컸다.

 

평택 포승지역 명가 함평이씨, 이대원 이조헌 이병헌 등 구국 인물 배출

이조헌의 호는 수송이다. 빼어난 소나무처럼 일생 곧은 지조를 지키며 살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다. 포승읍 일대에 기반을 둔 평택의 명가 함평이씨는 독립운동가 이조헌과 이병헌을 배출했다. 조선 선조시기 임진왜란 직전 남해바다 고흥 손죽도에서 왜구를 격퇴하다 장렬하게 순국한 이대원 장군의 후예였다. 현대에도 이자헌 국회의원, 이계익 교통부장관, 이계철 방송위원장, 이계경 여성신문 사장, 이계안 현대카드 사장, 이계석 경기도의회 의장 등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수많은 국가 인재를 배출했다.

 

북경대에 수학하며 조선인유학생회에서 활동, 손문 위문하기도

이조헌은 1900년 현재의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출생했다. 1914년 14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북경대학 경제과에서 수학했다. 그는 북경에서 한인들과 교류하며 항일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4년 이후 북경조선인학생회 간부로 강연회, 토론회 개최, 회보 발간 활동을 했다. 자료를 보면 이조헌은 1924년 1월 북경조선인유학생회 회장 남철우 등과 함께 조선에서 북경으로 유학오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학교선택, 등록금 정보, 숙식 문제 등에 대한 지원 활동을 했다. 또한, 1925년 2월에는 북경조선유학생회를 대표해서 중국의 지도자 손문을 위문하기도 했다.

북경조선유학생회의 중산 손문 위문 기사 (조선일보 1925년 2월 24일자 2면)

북경에 있는 우리 유학생회에서는 병세 위독한 중산(中山) 손문(孫文)씨를 위문하기 위하여 지난 14일 오후 2시에 대표 주순효, 신시우, 이조헌 세 명을 협화의원에 보내어 손중산을 위문하는 동시에 따로 만들어 가지고 간 위문서를 드렸다. 손씨는 병세가 심히 위중하야 직접 면회는 하지 못하고 등언화(鄧彥華)씨를 만나서 “우리 유학생은 충심으로 선생의 병세가 속히 쾌차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 위문서를 드렸더니 등씨는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위문서를 바로 선생에게 드리겠다고 하였다(조선일보 1925년 2월 24일자 2면).

 

북경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원세훈과 교류하며 큰 영향 받아

또한 한인교민단체인 한교구락부 위원, 한교동지회 회원 등으로 항일활동을 했고 이로 인해 일제는 수송을 감시대상 인물인 불령선인으로 분류했다. 이조헌의 북경활동 시기 가장 깊은 교류를 가졌던 인물은 춘곡 원세훈이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원세훈은 이조헌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세훈은 1936년 잡지 『삼천리』에 1924년 북경에서 이조헌과의 짧고 소중한 인연을 ‘장거리 여행에서 길동무 하자던 옛벗’이라는 제목의 추모글을 남겼다.

 

수송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어디로 보든 확실히 여행길에서 나를 버리고 먼저 간 것이다. 나의 길동무 수송이 나를 버린 뒤에 나에게는 그와 같은 장거리 여행길의 길동무가 없구나! 아아 나의 장거리 여행의 유일한 길동무여! 봄바람 가을달에 나 혼자 외롭다는 것보다 앞길에 있는 높고 험한 산과 깊은 바다 거친 파도에 나 혼자 어찌 갈가? 먼저 간 자는 잊으리라 마는 아직도 남아 있는 나의 한을 누구에게 말하나! 아아 나의 길동무여(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년 6월 1일).

 

귀국후 인천에서 최초로 중국어학교 열어

그러나 북경지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1926년 초에 이조헌도 귀국을 하게 된다. 그는 인천에 정착해서 제과점을 경영하며 인천지역에서는 최초로 중국어 학교를 열었다.

 

인천청년연맹에서는 13일 오후 7시 30분부터 한어야학회(漢語夜學會)를 열기로 하고 방금 회원을 모집중이라는데 회비는 매월 오십전이라 하며 강사는 북경대학 출신인 이조헌씨라는바 인천서 한어연구회(漢語硏究會)가 효시인 동시에 희망자도 많으리라더라(조선일보 1926년 12월 13일자)

 

이 시기 수송은 북경서 인연을 맺은 원세훈에게 250원(약 현재 화폐로 2백만원 정도)의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임시정부 창조파를 이끌던 원세훈은 극도의 생활고를 겪고 있었고 이 자금 지원을 받아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에 드러나 취조를 받게 된다.

 

평택으로 내려와 진위구락부 설립 농촌계몽운동에 투신

현덕면 진흥 클럽의 농민 야학 발전 기사 (조선일보 1928년 3월 1일)

그는 이후 고향 평택에 내려와서 1927년 6월 12일 현덕면 운정리에 진흥구락부를 설립한다. 이 단체는 친목과 지덕체 세가지의 장려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위원장에는 이조헌, 학예는 이민복, 경리는 이국헌 등이 담당했다. 이 때 이조헌은 진흥구락부에 30원을 기부했다.

 

진위군 현덕면 운정리에 있는 진흥구락부는 작년 유월 십일 일에 오직 농촌계몽운동을 환기하자는 취지하에 이강헌, 이조헌, 이민복씨 등이 발기 창립한 이래 농촌 청년만으로 회원이 벌써 이백여 명에 달하여 크게 발전이 된다 하며 더욱이 작년 십일월부터는 근동에 있는 무식한 농군을 위하야 교양기관으로 농민야학을 경영한바 이개월 미만에 야학생이 벌써 이백사십 명에 달한다. 야학의 과목은 조선국문, 한문, 산술, 기타 농촌에 필요한 과목을 주로 하며 경비(經費)는 이강헌 이조헌 이민복 세 사람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운영한다. (조선일보 1928년 3월 1일)

 

항일독립자금 모아 국내외 단체 꾸준하게 지원

진위구락부 대표로 이조헌은 찬조금도 모았다. 이 돈은 항일독립자금으로 중국 등지에 송금되었다. 고향 선배 안재홍과 중국서 인연이 깊은 원세훈은 1931년 재만동포구제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안재홍-원세훈-이조헌으로 이어지는 귀한 인연으로 추측해 볼 때 당시 평택지역에서 이조헌이 비밀리에 모금 사업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귀국후 이조헌의 고향 진위에서의 농촌계몽운동은 1927년 2월 안재홍이 창립을 주도한 신간회 운동, 1929년 4월 생활개선운동, 7월 문자보급운동의 현장 실천으로서 의의가 값지고 소중하다.

이조헌씨 장서(서거) 기사 (조선일보 1933년 8월 25일)

1933년 8월 갑작스러운 척수신경염으로 34세의 나이에 요절

신문 자료를 보면 1933년 8월 14일 이조헌은 갑작스러운 척수염으로 급서했다. 그는 이시기 농촌계몽운동과 함께 중국어교재 발간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생 조국 독립과 민중계몽에 힘쓴 청년운동가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급서한 이조헌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다.

다년간 북경과 운남 등지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많은 활동을 하던 진위 출생 이조헌(34)씨는얼마 전에 귀국하여 수일 전 경성에 와서 머물던 중 별안간 척수신경염이라는 급병에 걸려 의전병원(醫專病院)에 입원 치료중이었는데 불행히도 14일 오후 2시에 급서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33년 8월 25일 )

 

20세기 초 중국어 어휘의 보고 <중어대전> 간행으로 중국어교육사에도 큰 족적 남겨

일제강점기 여러 지식인들이 중국어 교재를 편찬했다. 조선일보 시절 민세와 함께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한 장지영은 만주어 강좌(1934)와 중국어회화전서(1939)를 출간했으며 훗날 고려대 교수를 지낸 이상은도 표준지나어강좌(1939) 등을 발간했다. 이조헌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중어대전>의 발간이다. 이 책은 총 110과로 구성되어 있고 2,500개 이상의 문장이 수록되어있다. 당시 알려진 모든 어휘를 망라한 20세기 초 중국어 어휘의 보고라고 평가받는다. 이조헌은 1929년부터 4년간 교재 편찬에 착수 1933년 방대한 원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해 8월 이조헌이 급서했고 이후 원세훈, 동생 이점헌 등이 교정 작업 등에 힘써 1934년 책으로 발간 빛을 보게된다.

이조헌이 발간한 <중어대전> (1934)

20세기초 중국어 교재의 백미 <중어대전>을 발간한 이조헌, 해방후 최초 중국어신문 발행한 안재홍의 한중우호 의식 알려야

늦게나마 평택시 등의 관심과 지원으로 독립운동가 이조헌에게 건국훈장이 수여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의 서거일이 이번 취재 기사를 통해 확인될 정도로 아직 이조헌의 삶과 활동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독립자금 지원, 농촌계몽운동, <중어대전> 발간 등으로 요약되는 짧은 기간 성인교육자로서 항일운동의 업적은 앞으로 평택 항일운동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 나갈 필요가 있다. 평택은 중국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도시이다. <중어대전> 발간으로 청년들의 중국 독립운동 참여를 도운 이조헌, 1945년 해방후 한국 최초로 중국어신문을 발간한 안재홍의 고향이 평택이다. 이들의 멀리 내다보는 한중우호의식이 평택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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