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평 1934년

[평택시민신문] 평택 출신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과 관련한 단행본이 현재 현재 100여 권 넘게 출간돼 있다. 한국 근현대 지성사에서 안재홍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 걸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줏대 있게 고민하며 국가비전을 설계하고 실천한 민세 안재홍. 그를 다룬 책들을 찾아 그 의미와 핵심대목, 독서 포인트 등을 소개해 민세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민세와 호암 1934년 9월 다산 서세 99주년 맞아 조선학운동 전개

이 책은 일제강점기 민세와 함께 조선학운동에 참여했던 호암 문일평(1888∼1939)이 1934년 한 해 썼던 일기다. 이 일기에는 민세를 비롯해 홍명희, 이광수, 김성수, 정인보, 한용운 등 당대 언론계, 학계 최고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안재홍도 당대 여러 인물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고 그들에 대해 회고 기록도 많이 남겼다. 1910년∼13년 일본 동경에 유학했던 민세는 그 시기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며 여러 물들과 교류했다. 민족변호사로 활동한 김병로,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김성수와 송진우 등이 와세다대학 시절 친구였던 안재홍에 대한 회고 기록을 남겼다. 민세보다 나이가 3년 위였던 호암 문일평도 두 번째 일본 유학시절인 1911년 와세다대학에서 민세와 함께 수학했던 귀중한 인연이 있다.

민세는 1933년 11월 5차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나온다. 1934년 4월 자의학전문학교(현 고대의대 전신) 설립운동에 참여하고 6월에는 황해도 구월산을, 7월∼8월에는 남해 충무공 유적을 답사했다. 9월 8일 서울서 다산 서세 99주기 기념강연이 있었다. 이것이 정인보, 문일평, 현상윤 등이 함께 한 조선학운동의 시작이다. 당시 호암은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위촉 언론과 집필활동에 몰두했다.

 

일제 탄압에 맞서 조선다움 지키고자 큰뜻 모은 친구 민세와 호암

이 책에는 호암이 민세와 1934년 한해 3번 개인적 만남을 했던 기록이 나온다. 2월 10일에는 민세의 집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고 열흘 후인 2월 20일 민세를 방문해 시간을 보내고 회포를 풀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11월 10일에는 늦은 밤에서 새벽까지 함께 대화를 나눴다. 아래는 11월 10일 기록이다.

 

출근해서 대민관계 오십년사를 썼다. 밤 10시 반쯤 한광호가 자동차를 보낸 나를 맞이하며 청요릿집 대관원에서 술을 마시고 다음날 새벽 4시쯤 헤어져 돌아왔다. 밤에 안재홍 군 집을 방문해 시간을 보내며 회포를 풀었다. 오전 9시쯤 집에 돌아와 잤다. 식은 땀이 많이 나오면서 매우 피로를 느꼈다. 며느리가 돌아왔다. 맑았다(문일평, 문일평 1934년. 146쪽).

 

이 일기에는 식민지 지식인 호암의 지적 고뇌가 솔직히 쓰여 있다. 1939년 4월 친구 호암이 타계했다. 민세는 8번째 옥고를 치르고 있어 장례식에도 못갔다. 해방후 다시 간행된 호암의 유고 『조선명인전』 서문을 그 아들이 찾아와 부탁했다. 민세는 먼저 간 벗을 추억하며 서문을 썼다. 일제의 문화 말살에 맞서 조선정신을 지키고자 분투한 민세와 호암의 교류는 우리에게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황우갑 본지 시민 전문기자·민세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