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호 혜초비에서 출발한 원효길

[평택시민신문] 평택호 혜초비에서 출발한 평택섶길은 원효길. 굳은 팔다리를 풀고 멀리 공세리성당을 호수 건너편에 놔둔 채, 아산만 방조제를 바라다보며 선조들이 걸어간 옛길을 따라 스무 명가량이 발길을 내디뎠다. 굳이 원효 스님을 꼽자면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보다는 요석공주와 이두를 고안한 설총이 먼저 떠오른다. 곧바로 만난 곳은 한국소리터.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김용래 기예능 보유자가 이끄는 웃다리 농악으로 알려진 마당에 야외공연장을 갖추고는, 시나위 명인인 지영희를 기리는 국악경연대회를 예정하고 있으나 코로나로 인해 그대로 열릴지는 미지수. 부디 전통의 두드림과 창작의 어울림이란 꾸밈말에 걸맞게 라임(rhyme)처럼 흥과 멋이 신나게 어우러지기를 바랄 뿐이다.

해군2함대사령부 영내에 있다는 괴태곶 봉수대는
원정초등학교 입구에 기념공원을 만들어 명맥 이어
역사유적조차 우리 뜻대로 못하는 딱한 형편에
무력감을 넘어 밀려드는 자괴감을 어쩌랴

서둘러 모내기를 끝낸 논배미에서는 벌써 새끼를 친 듯 벼포기들이 무논에 꽉 들어찬 느낌이다. 일행과 담소를 나누다 새삼스레 되짚어본 건 우리네 물가 중에 제일 싼 게 쌀밥이란 현실. 공깃밥 한 그릇의 원가가 고봉으로 담아도 고작 500원 미만이라면 이건 좀 심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하긴 고소한 달걀 한 개는 그 반값이라면 비지떡은 여태 싼 대로 잘 계시온지? 그나저나 섶길 연재를 맡은 나로서는 메모하랴 사진 찍으랴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고맙게도 곰살맞은 산들바람에 솜구름이 하늘 그늘을 만들어줘 걸을 만했다. 게다가 권관리 마을에 가득 핀 야생화들이 활짝 웃으며 길손을 곱게 맞아 고이 보내주었다.

오늘의 다초점 렌즈는 장수리길. 일행 가운데 냉큼 산티아고 순례길을 닮았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멘트를 덧입힌 농로야 그렇다 치고 두메라는 옛 명칭답게 주위를 싹둑싹둑 잘라내지 않은 게 그나마 시골 풍광을 살렸다. 그러기에 한껏 정겨운 논둑길. 딱딱한 콘크리트를 피해 피어난 풀꽃들도 예쁘고 간간이 뵈는 수풀도 싱그럽지만 내게는 휴경지를 풍성히 채운 늪지대가 더 귀하게 다가온다. 그 곁으로 다가서자 기온이 뚝 떨어진 느낌. 비록 유기농은 아닐지라도 농약을 적게 칠수록 토질은 기름져 가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색다른 풍경에 동공이 확 커졌다. 여기저기 야산을 깎아 계단처럼 만든 다랑논들. 때마침 땅뙈기를 돌보느라 발소리를 자주 낸다는 분더러 물으니 산업화가 대세일 때 막무가내 개간을 다그쳤단다. 그게 한참 모자란 통치술. 미래를 위해 숲은 얼마간 남겨두는 게 백번 옳았다. 물려받은 대자연을 지키는 비결은 평화로이 공존하는 일!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수로에 흐르는 물처럼 직거래장터를 활성화한다면 농업이야말로 생명을 책임질 먹거리 생업으로 갈채를 받을 테니까.

점심을 가볍게 들고 후진적인 횡단보도를 건너 위험천만한 대로변을 걸었다. 섶길이라기엔 낯 뜨거운 구간. 하루아침에 바로잡을 순 없겠으나 중장기 계획을 세우라고 탄원한다. 다리 밑을 보니 잔뜩 오염된 갯물길. 예전에는 털게들이 줄지어 기어나와 갯벌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단다. 미세먼지를 내뱉듯 긴 한숨을 내뿜자마자 홀연히 나타난 흙길. 대뜸 낫을 꺼내 풀숲에 묻힌 섶길 표지석을 만지는 손길이 있었다. 보아하니 완충지대로 꾸민 간이차로. 만약 생채기처럼 패인 바퀴 자국을 지울 수만 있다면 애써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곳에 열린 앵두와 딸기며 오디를 맛보는 이들. 물론 일부는 지레 매연을 머금었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길가마다 유실수를 심어 보리수에 개복숭아나 능금을 따먹어도 괜찮다면 얼마나 좋을까? 탐스런 열매를 코앞에 놓고도 선뜻 입에 댈 수조차 없는 삶의 여건이라면 이건 너무 슬픈 현재다.

그렇듯 아쉽게 흙길은 끝났고, 또다시 접어든 곳은 대형차가 오가는 외곽도로. 차라리 다들 도로 위 모랫길을 택해야 했다. 원래부터 산책길은 아니어서 발이 푹푹 빠져 걷기는 힘들어도 맘은 오히려 편했다. 인공 사구를 내려와 가드레일을 넘은 다음 산모퉁이를 돌아 어느 동네를 가로질러 고가도로를 머리에 이고 얼마큼을 가니 원효길의 중간지점인 평택마린센터. 거기부터는 한도숙 씨가 현란한 해설을 곁들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재야 사학자라기보다는 숨은 야사를 찾아 거침없이 엮어내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에 가까웠다. 그는 우선 평택과 화성이 벌이는 원효 스님의 궤적부터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해상로의 주요 출입구를 선점한 곳이 화성이라면 평택은 원효의 해골물을 고이 보존하고픈 심사일 텐데, 특별히 주목한 대목은 당항성(黨項城)과 당성(黨城)이 뒤섞여 쓰이는 지점. 그의 명쾌한(?) 추정인즉슨 통일신라 이전은 당항성이었고, 그 뒤로는 당성이 됐다는 가설이었다. 여전히 남는 의문점은 진흥왕의 한강 접수에 의해 중국으로 가는 내륙길이 열린 터에 왜 굳이 위험한 바닷길을 고집했느냐이다.

솔향이 가득한 공원길에서 만난 포승 오지사(五志士) 순절 추모비. 동족상잔의 비극이 절절히 적혀있었다. 새긴 행간에서 다가온 건 구전의 힘이 역사의 살점이라면 돌비의 힘은 역사의 뼈대라는 느낌. 평택섶길이야말로 본시 실크로드였고 서해랑길이며 코리아둘레길이라는 자긍심을 한껏 품고 가는 셈이다. 그때 화학성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길가에 가꾼 도시숲이 있으나 악취를 정화하는 데는 불가항력. 그러고 보니 일행이 밟고 지나가는 길바닥은 예전에는 갯벌이자 염전이었단다. 속수무책 나라를 잃기 전에는 짠물을 달여 자염(煮鹽)을 먹다가 왜인들이 만든 게 천일염이었던 터. 이를테면 양산체제로 축적한 소금을 섬나라로 실어간 수탈의 현장이었다. 작은(小) 금(金)이란 이름처럼 얼마나 귀했으면 로마 군인들 월급 대신 지급했을까? 내친김에 샐러리맨(salarium)의 어원까지 짚고 넘어가는 길도우미의 센스는 해박한 지적 배경의 영역이다. 어쨌거나 포승공단을 보노라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해군2함대사령부 영내에 있다는 괴태곶(槐台串) 봉수대는 원정초등학교 입구에 기념공원을 만들어 명맥을 이어갔다. 그 휑한 쉼터에서 열강을 듣는 동안 나는 왠지 자꾸만 몰려오는 허탈감을 쉬이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 역사유적조차 우리 뜻대로 못하는 딱한 형편을 어쩌랴. 무력감을 넘어 밀려드는 자괴감. 게다가 19세기 중반 세기의 장사꾼 오페르트가 기웃거릴 만큼 깊은 수심 덕에 평택제철이 생길 뻔한 일화도 듣는 둥 마는 둥 전두환이 광주 학살을 자행한 뒤 정치적 결정을 내린 내막까지 보태니 더 기가 막혔다. 이 순간 결코 잊지 말 일은 척박한 땅에 생사고락을 묻어둔 민초들의 삶이리라. 씁쓸한 시공을 뒤로하고 끼어든 숲길. 이중 철책을 두르고 야박하게 내준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니 전장웅 섶길 지킴이가 목청껏 외친 샘물이 나왔다. 요란스레 재잘거리는 시냇물 소리. 과연 지독한 가뭄에도 온 동네 식수는 물론 식구들 빨래마저 해치울 법했다. 그런데 웬걸, 그건 물소리가 아니라 바람소리였다. 느티나무 잎에서 나는 그 바람결에 하염없이 떠밀린 발걸음들이 어느새 하나둘 종착점에 모여들었다.

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쳤다.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고, 
퇴임 뒤 부락산자락에서 기고 활동과 
더불어 블로그(blog.naver.com/johash)를 
꾸리며 철학박사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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