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황포곶에서 내륙으로 보부상들이 걷던 물길, 산길, 논길, 마을길 12.5km

아산만 방조제 공사 전 소금배들 드나들던 곳
옛 황포곶에서 내륙으로 보부상들이 걷던
물길, 산길, 논길, 마을길 12.5km를 걷다

[평택시민신문] 황구지교에서 출발한 발길은 오산천을 거슬러 오르는 노정(路程). 오늘 길도우미는 제대로 진용을 갖췄다. 장순범 대표를 비롯해 입담 좋은 한도숙 씨와 강민수 살림꾼까지. 귓속을 파고든 머리말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온갖 사연의 파노라마. 황구지리에는 첨예한 역사의 후일담들이 얽히고설켰다. 옛 황포곶에서 내륙으로 보부상들이 쏘다녔던 물길, 산길, 논길, 마을길을 약 12.5km에 걸쳐 걷는다. 교차로 그루터기에서 바라본 천변 풍경. 먼지 낀 눈알을 정화할 만치 자연이 되살아났다. 아산만방조제 공사 전에는 코앞까지 바닷물이 올라와 소금배들이 드나들었다는데 시방은 갈대가 억새로 바뀐 지 오래. 그래도 백로 떼 대신 날아드는 가마우지를 가끔은 볼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금쪽같은 내 땅을 지키려는 농민들과 멀리서 굴러온 미국 병사들의 아귀다툼. 그걸 빼앗긴 실향민들의 심사는 어떨까? 하긴 주한미군의 영내에 갇혀버린 주민이나 금수나 고향을 잃긴 매한가지. 해방 이후 여태껏 풀리지 않은 숙제다. 철조망 너머 즐비한 격납고들을 보는 뒷맛이 씁쓸한 건 그래서다. 누구 말마따나 평택시의 미래사는 미군 주둔 때문에 줄곧 둘로 갈라질 형편인가 보다. 고대 진위현으로부터 송탄시를 거쳐 팽성현에서 평택시를 이룬 담에도 이처럼 활주로를 둘씩이나 거느리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왠지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세월교. 이른바 황구지(黃口池)는 진위천과 오산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예전에 항곶포(亢串浦)가 있었는데, 항곶이의 연음인 항고지라는 음운이 변천하면서 황구지가 됐다고 추정한다. 홍수 때만 되면 흙탕물이 흘러들어 땅마저 온통 누래지므로 붙인 명칭. 거센 물살에 패인 웅덩이가 황톳빛 물색을 띤 하구를 이룬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부락산 산줄기가 느릿하게 하천으로 흘러들면서 ‘느렁[黃] 곶’, 즉 '늘어진 구지‘에서 따왔다는 건 항설에 속한다. 가이드의 해설에도 오류는 있었다. 왜 송탄에 있는 비행장 이름에 ’오산‘을 붙여 부르느냐에 관해 풀어내기를 미 군용차가 오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왔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1970년 경부고속국도의 개통연도를 보더라도 1951년 송탄 일대에 육군부대를 설치한 뒤, 이듬해 2,700여 m의 활주로를 정비해 공군기지로 바꾸면서 그해 12월에 전투기를 배치했고, 한국 전쟁 중 미군은 오산천 둔치(현 오산종합운동장 일대)를 임시 비행장으로 잠시 사용하다가 지금의 K55 위치로 비행장을 옮겼으나, ‘Osan’이란 영문 표기가 ‘Songtan’보다 철자 수도 적고 발음하기 쉬워 'Osan AB'라는 기지명을 그대로 썼다는 게 정설이다.

미군기지 K55 오산 에어베이스와 회화교회
한온장군 사당, 매봉산 둘레길과 통관사 등
서탄지역 과거와 현재 알 수 있는 곳 많아 

그나저나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조용했는데 갑자기 요란스럽다. 굉음을 내며 이착륙을 거듭하는 미군 전투기 탓이로다. 해설자는 한사코 축하비행일랑 그만하라고 하늘을 향해 다그치지만 그나마 마니아들에게는 절호의 기회. 아닌 게 아니라 가까이서 촬영하기에는 아주 그만인 입지였다. 그늘을 벗어나 걷는 둑길은 대로변 옆 자전거도로. 일단 발상은 높이 살만했다. 다만 매끄럽지 못한 노면이나 줄지어 심은 가로수 선정은 문제점. 그러고 보니 오산비행장의 기다란 활주로 끝이 바로 황구지리, 그 반대편에 구장마을이 있었단다. 곧 일명 구장터는 나중에 서정리까지 밀려났다니 근거지를 잃은 백성들의 설움은 무얼로 갈음하랴. 비록 내로라 내세울 만한 문화유적이야 변변치 않다고 쳐도 식구들이 부쳐 먹던 전답을 내어놓고 하루아침에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 이들을 생각하니 손발에 힘줄이 불끈 솟는 느낌이다. 아예 딴 동네처럼 잘 꾸미고 사는 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볼라치면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 참 야릇한 건 북한의 70km 장사포를 격추하기 위해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한 마당에 마냥 배척할 수도 없거니와 중국을 겨냥한 사드를 추가 설치한다는 소문까지 돌아 그저 난감할 따름이다.

일반 차량의 통행 제한을 무시하고 달리는 차들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는 섶길 걷기. 길가에서 잔잔히 웃으며 맞는 꽃들을 벗삼아 위로를 얻는다. 찻길을 건너 접어든 동네는 회화리. 회화(檜花)라는 이름은 마을에 회화나무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는데 1914년 회화정리로 정했다가 나중에 ‘정’자를 뺐다고 한다. 우뚝 선 회화교회. 신축한 건물인 듯 외양이 번듯하다. 교파를 보니 한국기독교장로회. 그렇다면 한신대 계열이다. 일제강점기 3•1만세 사건으로 교인들이 옥고를 치른 데 이어 3개월간 예배당 문을 닫을 만큼 제 역할을 감당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 상당수 목회자들이 타락의 늪에 빠져 세습에 축재도 모자라 겁없이 음란의 죄까지 짓고 있으니 걱정이 태산이다. 이제 남은 길은 뼈아픈 회개뿐. 거꾸로 세상이 교회를 근심하지 않게끔 속히 뉘우치고 부디 언행일치를 이루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어쨌거나 지난날 이곳에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세울 만치 인근의 중심지였단다.

오전 날씨는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무더웠다. 금암3리(새말) 표지석을 지나 잠시 숨을 고른 곳은 한온 장군 사당. 20세에 과거에 급제해 조선 명종 때 장흥부사로 있었는데 을묘왜변을 당해 달량진에서 왜구와 맞서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장렬히 전사하셨다. 그의 애국충절을 높이 기린 선비 가운데 으뜸은 송시열. 정문(旌門) 안의 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鐵腸石膽一心殉國(철장석담일심순국)”, 곧 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그 마음은 오직 나라에 바쳤도다. 이 같은 정려기(旌閭記) 외에도 선정을 편 원님의 죽음을 슬퍼한 민초들의 시가 전해온다. ‘장흥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니 한공(韓公) 온(蘊)의 어진 정치를 알겠도다’라고 말이다. 출출한 분들이 계셔 여기서 점심을 들고 가자는 의견이 일부 있었으나 다수의 뜻에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멀쩡한 산을 깎아 파헤친 나대지. 뭉개진 공터에는 자리공이 흡사 재배지처럼 무성했다. 거기서 들은 신지식. 동행한 여성에 따르면 이걸로 국을 끓이면 그토록 맛있단다. 놀란 나머지 아내에게 전하니 그 독성은 어쩌냐는 표정?

옛 벗인 양 다가온 연꽃 단지. 연잎 뒤에 숨어도 될 만치 큼지막했다. 고명처럼 피어난 장미꽃 배웅을 받으며 제방을 따라 들어간 매봉산 둘레길. 정상까지는 완만했다. 감미로운 휴식시간. 남은 생수를 마시며 귀담아들은 매봉(峰)의 어원은 흥미로웠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높은 데서 매를 날리다 부르게 된 이름이 아니라 그냥 메라는 우리말로 지은 조어라는 게 요지. 실제 그런 명칭이 전국에 산재한다는 데 설득력이 있어 뵀다. 그밖에 금각리(金角里)는 마을 주변 지형이 와우형(蝸牛形)으로 쇠뿔[牛角]에 해당한다고 ‘쇠뿌리’로 부르던 걸 한자로 바꿨다는 설명. 용소리(龍沼里)는 본래 ‘농소리’라고도 했는데 용소마을(말)에 있는 두 개의 샘이 용의 눈과 같다는 데서 유래했고, 금암리(金岩里)는 마을 입구에 북바위가 있어 ‘종암(鍾巖, 쇠북 바위)’으로 부르다가 한자로 ‘金岩’이라고 표기했다. 우리말인 골안말은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내천리(奈川里)는 옛날 거기를 지나던 길손이 황구지천을 건너려다가 물살이 너무 세고 험하자 망연히 서서 ‘어찌하리오[奈河]’라며 탄식한 데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마두리(馬頭里)는 서탄면의 전체 형국이 말 대가리를 빼닮아 붙여졌다고 한다.

바로 밑에는 통관사(通觀寺)가 있었다. 그래서 여기를 예로부터 사리(寺里), 즉 절골이라 부른다는 그곳에서 귀한 먹거리가 일행을 기다렸다. 매번 차량 봉사로 수고하시는 금동항 님이 준비한 구운 달걀과 음료는 그야말로 꿀맛. 기갈이 들린 나그네에게 베푼 만나로 인해 고맙고 행복했다. 절터를 내려가다가 필자의 눈길을 잡은 건 목각 표지 화살표. 아쉽게도 ‘황구지길’을 밟아오는 동안 도저히 혼자서는 찾아 걷기 힘들겠다는 우려와 겹치는 지점이었다. 사리교를 건너다 발견한 물오리 떼. 퐁당 물 동그라미가 일자 푸드덕 날아오른다. 고대 호기심을 풀어준 싱싱한 야생이다. 널찍한 논둑길을 따라가니 어느덧 진위역. 반가움 반 생고생 반을 굳이 감추지 않은 채 함께 남긴 기념사진의 눈빛들은 벌써부터 다음 섶길 여행을 고대하는 듯했다.

조하식
수필가 · 시조시인
이충동에 살면서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고,
퇴임 이후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http://blog.naver.com/johash(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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