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을 신(新) 신간회(新幹會)운동의 발상지로 만들자

신간회기념사업회, 서산종리원·하남청년회관에서 10월 24일, 11월6일 신간회 표지석 건립

신간회 서산지회, 순회강연회 문맹퇴치 소비자조합 운동 통해 서산지역 항일의식 고취

신간회 하동지회, 지역적 현안 해결 주력하는 한편 당시 식민지 현실 극복 노력

 

하동청년회관서 진행된 신간회 표지석 건립 행사 이후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편집자주 평택시민신문은 2017년 신간회 창립 90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기억·전승하고자 신간회기념사업회와 함께 국내 4곳, 일본 2곳 등 6개 지역 사적지를 취재했다. 이번 6회는 마지막으로 최근 열린 신간회 서산지회 활동 공간 “천도교 서산종리원”과 신간회 하동지회 활동의 터전 “하동청년회관” 표지석 제막 취재 기사를 싣는다. 취재 일정을 도와주신 천도교 서산교구 손우승 총무님과 하동청년회관 보전회 오대식 사무국장님께 지면을 통해 감사 뜻을 전한다.

 

서산지회 활동의 근거지 〈천도교 서산종리원〉

서산종리원에서 진행된 신간회 표지석 건립행사 모습

천도교 서산지회 활동의 근거지는 현재 천도교 서산교구인 ‘서산종리원‘이다. 1928년 4월 22일 이곳에서 서산지역 신간회 활동의 근거지였던 신간회 서산지회가 설립됐다. 이 곳 종리원은 신간회운동뿐 아니라 서산청년동맹 창립지기도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서산지역 항일운동의 핵심 공간이었다. 지금도 적지 않은 규모이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서산 읍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한다. 설립 당시 활동 임원 중 대다수는 이전부터 서산 지역 기자·금융조합 이사로 활동하거나 서산지역 청년운동·계몽운동·노동운동 등을 주도하는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신간회 서산지회는 순회강연회 개최, 문맹퇴치, 소비자조합 운동 등을 통해 서산지역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회장에는 이원생 선생이 선임되었고, 본부에서는 후에 다산 정약용 연구에 일가를 이룬 최익환 선생을 파견해 축하의 뜻을 전했다.

당시 신문에 “신간 서산지회는 예정과 같이 지난 22일(4월) 오후 2시부터 당지 천도교종리원에서 거행하였는데 정각 전부터 모여드는 청중은 무려 수백에 달하였으나 임석경관으로 돌연히 안내장을 휴대치 않은 사람은 방청을 일체 금지함으로 장내에는 자못 긴장되었으나 정각이 되어 김영찬씨의 개회사를 비롯하여 임시의장 김영찬, 서기 이일순, 사찰 이정주 3씨가 피임된 후 본부특파원 최익환 씨의 취지설명이 끝나고 강령과 규칙통과와 우의단체에서 온 축전 축문 2통은 임석경관이 압수하고” (조선일보 1928년 4월 28일자)라고 보도하고 있어 신간회 서산지회는 다른 지역보다 늦게 설립되었고 그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간회 서산지회 항일운동 선열의 정신을 기억하는 표지석 건립

10월 24일 이곳에서 신간회기념사업회, 조선일보사, 목포시 주최로 '신간회 서산 지회 활동 사적지 표지석 건립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신간회기념사업회의 강지원 회장과 이완섭 서산시장, 우종재 서산시의회 의장, 손우승 천도교 서산교구장 등 60여명이 참석했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17만 서산시민과 함께 표지석 건립을 축하하며, 그 동안 잘 몰랐던 서산지역 신간회운동을 재조명하고, 관련 기관단체와 협의해서 유서 깊은 이 건축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보전하는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기념 강좌에서 “천도교 서산종리원은 3․1운동 이후 천도교 서산청년회의 활동공간이자 여러 계몽단체․청년단체 집회장소였으며 1928년 4월 22일 신간회 서산지회 설립총회를 개최한 족적을 남겼다. 현재까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원형을 보존한 서산지역을 대표하는 역사공간으로 향후 보전과 독립운동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산종리원 신간회 표지석

하동신간회지회 활동의 근거지 〈하동청년회관〉

하동청년회관은 1926년 건립되었다. 1927년 10월 20일 이곳에서 신간회하동지회 설립대회가 열렸다. 이후 일제는 이곳을 하동 청년 단체의 독립 운동 장소로 여겨 하동읍 공회당으로 사용하겠다며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청년 단체가 강력한 거부 의사와 함께 쌍계사 측에 기부 형식으로 소유권을 넘겼으나 끝내 공회당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 고등공민학교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훼손이 심해 재부하동향우회의 성금으로 보수하고 하동청년회관 관리 위원회가 조직되어 관리를 맡았다. 이후 1989년 6월 15일 하동군의 예산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1989년 개보수 공사와 함께 회관 광장에 기념비를 세웠다.

 

〈하동항일독립공원〉 기념비에 민세 안재홍 선생 참석 사실 새겨 넣어

기념비에는 하동청년회관의 역사와 함께 하동지회 설립당시 민세 안재홍 선생께서 이곳을 다녀갔다는 사실도 명기해 놓았다.

이 고장의 정신적 지주로 항일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지방 문화 발전의 핵심으로 그 사명을 다해 왔다. 특히 이 회관을 중심으로 신간회, 근우회의 전국적 독립 운동과 하동청년동맹, 농민회 등의 지방적 조직을 통한 민족 독립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해 왔으며,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안재홍(安在鴻) 선생 등이 내방하여 광복을 위한 외침이 울려 퍼졌던 곳이기도 하다.

1927년 10월 20일 이곳에서 신간회 하동지회 설립대회가 열렸다. 신간회 본부에서는 안재홍과 홍명희가 참석하는 대단한 열기였다. 당시 임원진은 회장에 조동호 선생이, 부회장 김낙진 선생이 선출되었다. 하동지회는 본부와 달리 지역적인 현안을 해결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당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병행했다. 당시 토론 자료를 보면 조선인의 정치경제생활 상황조사, 각도 이재민구제에 관한 건, 재만 동포문제, 조선인의 교육문제등을 다루고 있어 신간회 하동지회는 명실상부한 하동지역 사회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는 구심체로서 역할과 자리매김했다.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관에서 신간회기념사업회 관계자 및 평택 인사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90년만에 하동청년회관에서 표지석 제막식 열려

11월 6일 오후 하동청년회관에서 신간회기념사업회, 조선일보사, 하동청년회관보전회 주최로 '신간회 하동지회 활동 사적지 표지석 건립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강지원 신간회기념사업회장, 서경덕 신간회기념사업회 부회장, 윤상기 하동군수, 정의근 하동군의회 의장, 정연가 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 회장, 김형갑 광복회 경남지부장, 김덕석 경남서부보훈지청장,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이주상 전 경기도의회 부의장, 김미영 평택문화원 부원장, 이한칠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 이사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강지원 회장은 “자랑스러운 하동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에 90년 만에 표지석을 세울 수 있어 기쁘고 앞으로 이 공간이 하동지역 시민 청소년들을 위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널리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기념강연에서 “일제 강점기 하동은 지리산과 인접한 지역특성상 의병운동을 시작으로 3.1운동, 신간회와 근우회 하동지회 활동, 청년운동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자랑스러운 항일운동의 고장”이라고 평가했다.

 

안재홍 선생 신간회 대구·김천·하동·진주·고성·함양지회 설립에 참석

올해 국내 마지막 신간회 표지석 건립에는 평택 출신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 선생이 1927년 신간회 경상도 지역 지회 설립당시 대구, 김천, 하동, 진주, 고성, 함양 등을 방문했던 기록도 있어 그 길을 따라 평택지역에서 20여명이 함께 했다. 민세는 1926년 4월 전조선기자대회 행사차 하동 쌍계사에서 묵고 “목련화 그늘에서”라는 명수필을 남겼다. 당시 그 글에 나오는 팔영루, 최치원이 지었다는 진감선사비문,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금당” 글씨 등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고단한 삶속에서서도 신간회 준비기 민세 안재홍의 남도 삼천리 열정도 느낄 수 있었다.

 

신간회 100주년을 준비하며 평택 항일운동의 전국성 높이는 계기 만들어야

내후년이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이번 신간회 국내외 취재를 통해서 3.1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항일운동단체였던 신간회의 위상과 활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2027년 신간회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평택에서 신간회의 사회통합, 민족통합, 지역통합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한 신 신간회운동이 새롭게 시작되어 그 정신도 계승하고 평택 항일운동의 전국성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어나가면 좋을 것이다. <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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