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역 인근 뵤도인 입구 우지교는
시인 윤동주가 친구들과 마지막 소풍 즐긴 곳

 

고류지에는 일본 고대국가 완성한 쇼토쿠태자상과 일본 국보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 등 국보 12점과 중용문화재 48점 소장

고구려 승려 혜자는 쇼토쿠태자의 스승으로, 신라 도래인
진하승은 핵심 브레인으로 제방·양잠·관개농법 등 전수

아름다운 건축에 더해 유물특징 살린 뵤도인 봉황당 전시기법은 환상적
아마타여래좌상 등 일본 문화 완숙기인 가마쿠라시대 26구 작품 전시

 

 

 

[평택시민신문]  ‘가깝지만 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본. 위치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역사‧문화적 갈등으로 우리는 일본 그대로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도 “40여년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쳤지만 일본을 너무 몰랐다는 반성이 가슴을 찔렀다”고 고백하며, 일본 교토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번 교토여행을 통해 “일본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김해규 소장. 한광중학교 역사 교사이기도한 그의 ‘좌충우돌 교토여행기’를 <평택시민신문>은 5주간 연재하며, 일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여름밤 이자카야 풍경
 숙소는 니시키시장 입구에 있었다. 화장실 별도의 공용 4인실을 예약했는데도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다.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러 나섰다. 애초 맛 집 탐방은 포기했지만 숙소가 시장과 가까워서 밥 먹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불과 저녁 7시가 넘었을 뿐인데도 시장 점포들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어두운 골목을 헤매다가 늦게까지 문을 연 식당이 보이기에 간단히 요기만 했다.
 저녁을 먹고 거리구경에 나섰다. 8시를 갓 넘긴 시장골목은 적막할 만큼 조용하고 어둡다. 간간히 자전거를 탄 주민들과 기온 마쓰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나갈 뿐이다. 어두침침한 골목 안쪽 아주 작은 이자카야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이 한 평, 홀이 두어 평쯤 되어 보이는 작은 술집. 마을사람들로 보이는 손님 서너 명이 텔레비전으로 야구를 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신들만의 아지트에 불쑥 낮선 여행자가 끼어들자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말도 안 되는 영어, 일본어로 너스레를 떨며 한쪽 귀퉁이에 앉아 일본소주 한 잔과 꼬치구이를 시킨 뒤 옆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한신타이거즈 팬이세요?’ 6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아니오’라고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 모습이 시골 구멍가게에서 만난 경상도남자 같아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손님들과 주인과 어울려 1시간쯤 놀았다. 이자카야의 술도 익어갔다.
 숙소로 돌아와 1층 휴게실에서 둘째 날 일정을 짰다. 둘째 날은 국철이나 지하철 중심으로 코스를 짰다. 계획까지 짜고 났더니 또 다시 무료해졌다. 옆에 앉은 외국인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Excuseme. you are from?’ 낮선 동양인의 질문에 금발의 백인 여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프랑스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 질문은 ‘how long will you stay?’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것이 내가 아는 영어의 전부인데도 대화가 됐다. 깊이 있는 대화는 핸드폰 번역기가 도와줬다. 해외여행에서 영어가 절대 진리가 아님을 알게 하는 순간이었다.

후지와라노 요시미치의 극락(極樂) 뵤도인
둘째 날 오전에는 도후쿠지(동복사)와 우지의 뵤도인(평등원), 오후에는 아라시야마 일대를 답사하기로 했다. 이들 지역은 일본의 고대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한일관계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도후쿠지와 뵤도인을 가려면 가와라마치역에서 전철을 탄 뒤 교토역에서 나라선 국철로 갈아타야만 한다. 전철역 구내에서 방향을 알 수 없어 의자에 앉은 중년 남성에게 ‘교토 스테이션?’이라며 방향을 가리켰다. 그랬더니 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친 긍정은 때론 잘 모른다는 것이기도 해서 젊은 청년에게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방향이 틀렸다고 했다. 안심하며 전철을 기다리는데 처음 길을 물었던 중년 남성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자기가 잘못 가르쳐줬다며 정말 미안하다는 것이다. 가슴 뭉클했다. 일본인의 친절을 의심했던 과거도 반성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뵤도인(평등원)은 교토역에서 열 정거장쯤 거리에 있다. 우지역에서 내려 10분 걸었더니 뵤도인이다. 입장료는 600엔, 여전히 비싸다는 느낌이 든다. 우지는 풍광이 수려하여 헤이안시대나 가마쿠라시대 귀족들의 별장이 많았다. 또 선종(禪宗)의 영향으로 발달한 차(茶)문화가 발달했는데 지금도 차(茶) 재배가 성(成)하다. 뵤도인은 가마쿠라시대 후지와라노 요시미치가 세웠다. 요시미치는 부친의 별장을 물려받아 이곳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극락세계를 연출했다. 당시 불교는 ‘말법 신앙’이 유행했다. ‘말법(末法)’이란 기독교의 ‘종말론’과 같은 개념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세에 극락왕생을 희구했다. 뵤도인은 후지와라노 요시미치라는 당대의 최고 권력자가 지상에 만든 극락세계다. 본존불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것도 아미타가 극락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봉황당은 뵤도인의 중심 전각이며 아미타여래의 거처다. 일본 특유의 주황색 단청에 용마루 양쪽에 봉황을 앉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한여름이었지만 아자못에 어린 봉황당은 환상이었다. 시간제한이 있어 내부관람을 못하고 유물전시관인 봉상관으로 들어갔다. 봉상관은 경사면을 깎아 반지하층과 지상1층 구조로 건축되었다. 건축도 아름답지만 유물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뒤 적절한 조명으로 장점을 극대화시킨 전시기법은 참으로 놀라웠다. 전시실의 중심에는 아마타여래좌상과 운중공양보살상이 펼치는 구품만다라가 펼쳐졌다. 본래 봉황당 안에 모셔졌던 52구 중 26구만 옮겨 전시한 것이다. 조각수법이 뛰어나서 알아봤더니 가마쿠라시대 조초라는 전문기술자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가마쿠라시대를 왜 문화적 완숙기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봉상관 앞 ‘등원’이라는 찻집에서 차(茶)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전차(煎茶)라고 해서 주문했는데 말차에 가깝다. 사찰 입구 상가에서는 녹차를 넣은 메밀 소바와 유부쌈으로 점심을 먹었다. 우지의 메밀 소바는 한국보다 면이 뻣뻣하고 장국에서는 간장냄새가 진했다. 뵤도인 입구우지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가운데 하나다. 우지는 고전문학 ‘겐지이야기’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시인 윤동주도 도시샤대학 친구들과 마지막 소풍을 이곳에서 즐겼다.


3.고류지(광륭사)의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시간이 촉박해서 도후쿠지(동복사) 답사를 뒤로 미뤘다. 아침에 탔던 나라선 보통열차를 타고 교토역을 거쳐 우즈마사와 아라시야마로 날았다. 우즈마사와 아라시야마 일대는 4세기 신라에서 건너온 진(秦, 하타)씨의 근거지다. 진(秦)씨는 선진적인 제방기술로 가쓰라강(桂川)에 대언천 제방을 쌓아 관개농업으로 교토습지를 개척했다. 또 선진기술이었던 양잠, 양조, 제철, 목공기술을 전파하여 간무천황이 헤이안쿄를 건설하도록 발판을 다졌다.
 우즈마사는 한자로 태진(太秦)이다. 태진(太秦)은 하타씨 중에서 양잠에 뛰어났던 진주공(秦酒公, 하타노 사케노키미)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해서 유래되었다. 지금도 우즈마사지역은 고급비단의 생산지다. 우즈마사에는 고류지(광륭사)가 있다. 고류지는 쇼토쿠태자의 후원자였던 진하승의 씨사로 건립되었다. 진하승은 아라시야마지역과 고류지를 중심으로 쇼토쿠태자와 정치적 관계를 맺어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 든든한 후견인으로 활약했다.
 서문으로 입장하여 삼문(三問)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고류지의 중심 전각은 쇼토쿠태자를 기리는 태자전이다. 태자전은 고대 우리나라 사찰의 건축양식과 닮아서 눈길을 끌었지만 문을 잠가놓은 데다 창호에 조그만 구멍만 내놔서 답답했다. 돌아서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마루에 올라섰다. 태자전은 내부보다 앞 벽면이 눈길을 끌었다. 벽면에는 여러 건축회사들이 내건 현판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개중에는 19세기의 것들도 눈에 띈다. 쇼토쿠태자를 일본 건축의 원조로 생각하여 걸어 놓은 현판이라고 한다. 고류지에는 태자전 외에 더 볼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강당도 그저 그랬고 진하승을 모셨다는 우즈마사 신전은 찾을 수조차 없었다. 적잖이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태자전 뒤쪽으로 입장료 창구가 보였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800엔이나 한다. 도대체 어떤 곳이냐고 물었더니 ‘보물전시관’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보물전시관은 800엔이 아까워 지나쳤더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이곳에는 교토여행에서 꼭 봐야할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우는 상투미륵), 쇼도쿠태자상, 진하승 부부상이 있었다. 또 헤이안시대부터 에도시대까지 국보 12점, 중요문화재 48점이 소장되어 있어 충분히 800엔의 가치를 하고도 남았다. 보물전시관의 스타는 단연 일본 국보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단아한 미소와 기품 있는 자세로 ‘일본의 미소’라며 사랑받는 불상이다.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출처가 한반도라는 설이 유력하다. 제작시기가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비슷한데다 재질도 우리나라산 적송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데 일부에서는 적송과 함께 일본산 녹나무가 사용되어 그렇지 않다는 반박도 한다. 그동안 필자도 한국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했다. 하지만 교토박물관과 뵤도인의 불상들을 보면서 어쩌면 내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글: 김해규(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좌우에는 쇼토쿠태자상과 진하승 부부상이 있다. 두 목상(木像)은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스타일이 닮았다. 공부가 짧아 당대 지배층의 트렌드인지 아니면 삼국의 전래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거리에서 한 번쯤은 봤음직한 무척 친근한 표정이다. 다이카개신(大和改新)으로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한 쇼토쿠태자는 일본에서 세종대왕만큼이나 유명한 인물이다. 심지어 가마쿠라시대에는 신앙적으로 숭배되기까지 했었다. 쇼토쿠태자의 스승은 고구려 승려 혜자였다. 또 신라 도래인 진하승(秦河勝, 하타씨)은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했다. 도래인들의 앞선 제방기술과 관개농법, 양조·양잠기술도 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가 진하승의 씨사였던 고류지에 모셔진 이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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