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과 평택 9- ① 미군기지와 기지촌에서의 삶 1 (K-55)

[평택시민신문] 지난 2018년 7월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이전이 완료됐으며, 본격적인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평택시민신문>은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주한미군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사 차원의 주둔역사를 정립하고, 미군과의 바람직한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평택주둔 약사 및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책에는 평택의 각계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이 참여해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 역사와 미군주둔이 평택인의 생활과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더불어 주한미군 평택시대에 대처해야 할 지역사회의 과제 등 평택시민에게 주어진 미래의 과제를 살펴보는 내용도 담겼다.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점에 지역사 차원의 미군 주둔 역사를 이해하고, 한미양국의 이질감을 줄이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평택시민신문>은 해당 도서의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이번 글은 연재의 마지막으로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의 '미군기지와 기지촌에서의 삶'을 싣는다.

 

 

전쟁피난민, 빈농 등이 모여 독특한 정체성 형성

미국의 문화, 기지촌 통해 한국사회로 퍼져나가

 

1. 6.25전쟁과 미군기지

미군 스미스부대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인 총검고지 전적지

[평택시민신문]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휴전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3개월 뒤에는 대구와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 전 지역을 점령했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선언으로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미국은 한반도의 공산화가 일본과 태평양지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움직여 유엔군의 참전을 결정했다.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뒤엎은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뒤 이어 38도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1949년 국공내전의 승리로 공산화에 성공한 중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시 신장동과 서정동 일대까지 후퇴했고(1.4후퇴) 다시 반격을 가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38도선을 넘어 철원과 김화일대까지 진격했다. 이 단계에서 소련의 제의로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휴전협정이 전개되는 가운데 한국군과 북한군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전쟁이 끝났다.

장등1리 당목이었지만 미군기지 안으로 들어간 장등리은행나무

평택지역은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국도 1호선과 국도 38호선 등 남북과 동서를 잇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전쟁의 피해가 컸다. 전쟁 초기 유엔군의 평택역과 원평동 일대의 폭격은 큰 피해를 남겼다. 폭격으로 평택역은 기능이 정지되었고 평택군청과 경찰서를 비롯한 주요 공공기관 그리고 평택시장과 민가들이 불에 타고 파괴되면서 휴전 후 시가지의 중심이 철도 서쪽에서 동북쪽으로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4후퇴 때는 합정동 조개터를 비롯해서 국도 변의 주요 마을들이 유엔군에 의해 방화되었다. 1951년 2월 7일에는 적봉리 부근 180고지(총검고지)에서는 미군 이지중대(Easy Company)가 중국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6.25전쟁은 평택시가지의 폭격과 함께 미군기지의 주둔을 가져왔다. 미군의 주둔으로 신장동과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는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평택을 군사도시 또는 기지촌 도시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다. 이밖에 평택의 정치, 사회, 경제가 직간접적으로 미군기지와 관련을 맺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청년회의소(J·C)운동이나 4H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이 미군기지를 통해 전파되었고, 미국의 대중음악이나 그림, 음식, 각종 생활문화가 미군기지를 통해 수입되어 한국사회로 퍼져나갔다. 전쟁피난민들의 이주와 정착도 6.25전쟁의 영향이다. 6.25전쟁으로 평택지역에는 수십만의 전쟁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황무지가 많았던 지역, 또는 팽성읍이나 서평택지역의 바닷가에 난민정착사업소를 만들고 황무지개간이나 간척을 통해 경제기반을 삼았다.

 

2. K-55오산AB 기지촌

1)신장동 기지촌의 형성과 변화

6.25전쟁은 평택지역에 오산 공군기지(Osan Air Base, K-55)와 K-6캠프험프리즈라는 두 개의 미군기지를 주둔시켰다. 이 가운데 송탄북부지역에 주둔한 미군기지가 K-55오산공군기지(Osan Air Base, K-55)다. 이 기지는 1951년 말부터 송탄면 신장리 일부와 서탄면 적봉리, 장등리, 야리, 신야리 일대에 건설계획이 잡히고 1952년부터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었다. 미군기지가 건설되면서 기지가 주둔하는 원적봉 마을과 장등1리 긴등마을은 마을 뒤편의 산등성이로 집단 이주했다. 야리, 신야리 주민들은 경작지와 가까운 신장1동 구장터(폐동)와 제역동, 서탄면 황구지리, 금각2리 등으로 분산 이주했다.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기지 정문과 후문이 있었던 적봉리와 사거리 일대, 신장동 제역동마을(일명 지골)에는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전쟁피난민, 빈농들을 비롯하여 돈과 먹거리, 일자리가 필요한 다양한 부류들이 미군기지촌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기지촌은 평택시의 다른 도시나 농촌지역과 구별된 독특한 생활방식과 문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신장동 엘간골목 최초의 미군클럽 부기하우스(동백집)

1950년대 기지촌은 빈농들과 전쟁피난민, 전쟁으로 생계가 막막했던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기회를 제공했다.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기지촌 상업이 발달하면서 농업중심의 경제구조도 크게 변했다. 기지촌의 중심이었던 신장동 일대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상업지역과, 미군기지에 근무하거나 주변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지역,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미군기지 초기에는 정문이었다가 나중에 후문으로 설치된 서탄면 적봉리(현 서정동)와 서정동 사거리 일대에도 기지촌이 발달했다. 1960, 70년대 인구가 급증하면서는 신장2동 송월동과 밀월동 일대에도 호텔과 민가, 상가들이 들어섰고, 서정동에 속하는 복창동과 신흥마을에도 전쟁피난민과 빈민들의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에는 미군들을 주 고객층으로 하는 클럽(술집), 호텔, 식당(레스토랑), 양복점, 보석점, 사진관, 가방판매점, 화랑 등이 성업했고, 한국인 중심의 상업지역에는 중앙시장을 비롯하여 선술집과 식당, 식료품점, 포목점, 잡화점이 들어섰다. 미군기지 주변의 상업지구이다보니 신장동이나 서정동에는 기지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상점들도 많았다. 예컨대 미군기지에서 반출되는 식재료로 만든 부대찌개 스테이크 식당,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햄과 치즈, 소시지와 같은 식료품을 판매하는 상점, 각종 성인잡지와 책을 판매하는 서점, 레코드점, 각 나라의 다양한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 등이 그것이었다.

형성 초기의 기지촌은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종이상자, 나무로 된 과일상자와 같은 각종 물자들로 지은 속칭 ‘하꼬방’들이었다. 서정동 신흥마을과 복창동 언덕배기에는 땅굴을 파고 나뭇가지와 흙으로 마감한 ‘뗏막’이러고 불렀던 막집들도 있었다. 다양한 부류가 섞여 살다보니 기지촌의 인심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절도나 상해사건도 종종 발생했다. 또 잘못하여 화재라도 발생하면 순식간에 ‘하꼬방’ 집들을 태워버렸다. 하꼬방은 기지촌의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제역동(제골, 지골) 일대 신장쇼핑몰 거리를 중심으로 점차 벽돌이나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다. 뗏막과 하꼬방도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벽돌집으로 개선되었다.

신장1동 제역동마을 뒷골목

 

2)신장동 기지촌의 삶

기지촌 사람들의 직업은 매우 다양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통역관이나 군무원으로 근무했다. 배운 것도 신통찮고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하우스보이나 청소, 식당일, 빨래와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나중에 영어에 능숙해지고 업무능력이 향상되면 좀 더 나은 역할이 주어졌다. 1950, 60년대 미군기지에 다녔던 사람들의 주 수입원은 일하고 받는 급료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군기지에서 빼내오는 미제물건도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속칭 ‘미제물건’은 미군기지에 공급되는 석유나 휘발유를 비롯하여 햄, 치즈, 소시지, 버터, 마가린과 같은 식료품, 맥주를 비롯한 주류(酒類), 각종 의류(衣類), 각종 공구, 카메라와 같이 종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렇게 반출된 물건들은 기지촌 상점에서 팔리거나 속칭 ‘미제아줌마’라고 불렸던 여성들에 의해서 일반 가정에 공급되었다.

클럽골목으로 유명했던 코리아호텔골목

기지촌은 한국인에 의한 미군을 위한 공간이었다. 기지촌 상가의 중심은 미군클럽과 호텔이었다. 미군클럽은 적봉리나 사거리, 신흥마을보다는 미군들이 드나드는 신장1동 제역동(지골) 일대에 많았다. 제역동에서 클럽이 가장 많았던 곳은 미군기지 정문과 가까운 코리아호텔골목이었다.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클럽을 개업하려면 교통부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그래서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특권의식이 무척 강했고 미국과 미군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또 미군기지 정문에서 송북시장 방면으로 나가는 철도건널목까지의 일직선상의 도로 양쪽과 정문 우측 좁은 골목에는 식당, 의류점, 식료품점, 미장원, 양복점, 이발소, 사진관, 보석점이 있었다. 미군전용클럽 외에 미군대상의 상업으로 인기가 높았던 업종은 양복점과 사진관, 보석점이었다. 한국 수제양복은 값싸고 질이 좋은 편이어서 미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또 미국으로 귀국할 때는 기념사진을 찍기를 원했고, 선물로 수정이나 호박 같은 보석류를 가져가고 싶어 하였기 때문에 사진관이나 보석점들도 장사가 잘 되었다.

중앙시장에서 부대찌개로 명성은 얻은 김네집

코리아호텔과 영천관광호텔 골목이 미군상대의 상업지역이었다면 중앙시장과 삼보데파트(옛 삼보극장) 일대는 한국인들의 거리였다. 한국인들의 거리는 간판부터 한국어였고 주 고객층도 한국인들이었다. 중앙시장은 처음에는 제역동 미군기지촌 옆에 상점 몇 개와 노점들로 이뤄진 조그만 시장이었다. 상인들은 ‘아침 장(場)’이라고 불렀던 송북시장에서 도매로 각종 상품을 사와서 중앙시장에서 팔았다. 그래서 중앙시장을 저녁장, 다시 말해서 저녁때까지 장사하는 시장이라고 불렀다. 미군기지촌이 발달하면서 상점의 수가 늘었다. 주변지역의 농민들 가운데는 시장 안 골목에 노점을 열었다. 시장 주변에는 순댓국을 파는 감골순대국, 소머리국밥을 파는 개화식당, 야끼만두가 일품이었던 태화루와 같은 중국식당도 들어섰다. 포목점, 철물점, 잡화점, 계란가게, 닭집, 생선가게, 각종 선술집 등도 중앙시장 일대의 주요 상점이었다.

기지촌의 구성원은 미군기지에 근무했던 다양한 부류와 상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일명 양색시 또는 양공주라고 불렀던 기지촌여성들(미군위안부)도 있었다. 신장동 일대에 기지촌 여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60년대부터다. 파주, 동두천, 연천 일대의 미군기지가 감축되면서 돈벌이를 위해 이주한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운 것도 많지 않았고 본래 빈농이나 도시빈민의 자녀들이었던 그들은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동생들을 공부시키며, 재수가 좋으면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 가고 싶어 기지촌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미군을 접대를 하고 받은 대가는 군표와 달러였다. 기지촌에서 군표는 화폐와 같은 기능을 하였고 달러는 지금보다 수 십 배의 위력이 있었다. 기지촌 골목에는 군표나 달러를 바꿔주는 불법 환전상들도 많았다.

신장동 기지촌의 최고 호황기는 1960, 70년대였다. 미군들은 먹을 것 많고 값싸게 놀 수 있었던 신장동으로 몰려들었다.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하였던 미군들도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무료전세기를 타고 놀다 갔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기지촌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미군들이 감축되고, 모병제 이후 미군들의 씀씀이도 달라졌으며, 9.11테러로 외출도 어려워진데다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면서 달러와 미제물건의 위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필리핀이나 오키나와의 미군들에게 제공되었던 무료항공편이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중단된 것도 신장동 기지촌을 어렵게 만들었다. 2000년대 이후 기지촌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시장쇼핑몰을 조성하고 중앙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했으며, 각종 이벤트를 만들어도 좀처럼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다.

글: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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