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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대진과 영웅암 이야기(상)

기사승인 2020.09.16  1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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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누가 있어 영웅바위를 노래할까

[평택시민신문] 평택항 일원은 이전에는 대진(大津)이라고 불렸고, 이 한가운데에 영웅바위가 있다. 대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지만 충남과 경기도에 걸쳐 있는 아산만 일원을 지칭했던 표현으로 보인다. 영웅바위 역시 충남과 경기도에서 역사와 설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웅바위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역사적‧문헌학적 고찰이 필요한 상황이다. 최근 평택‧당진항 신생매립지 경계분쟁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대법원이 영웅바위를 현장 검증할 예정이라고 한다. 평택과 대진, 평택과 영웅바위에 관한 고찰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평택과 당진, 나아가 충남과 경기도가 역사적 경험을 공유했던 대진과 영웅바위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상생의 계기를 만들기를 기대해보며, ‘대진과 영웅암 이야기’라는 글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필자 한도숙씨는 전국농민회총년맹 의장을 역임하고 현재 평택섶길추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석자 윤한택씨는 고려시대사 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편집자 주

영웅바위 치솟은 바다가 대진, 지금의 평택항
평택 연안과 당진까지 포함하는 광역 개념
평택과 당진, 포구 많고 영옹암 전설 공유 
평택‧당진항 병기하는 의미 되새겨봐야 할 듯

현재의 영웅바위

평택이 바다를 끼고 있는 해양도시로 알려진 것은 근래에 들어와서 평택항이 자리 잡으면서 부터이다. 그전에 평택은 그저 내륙의 한 지역으로만 인식되었다. 지금도 평택이 항구도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평택지역은 오래전 삼국시대 이전부터 포구와 나루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고 바다와 수로를 통한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이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이다. 백제본기 온조왕 24년(AD6년) 기록에 온조왕이 웅천에 목책을 쌓았을 때 목지국(目支國) 진왕(辰王)이 꾸짖기를 “왕이 처음 강을 넘어와 머무를 곳이 없을 때 내가 동북으로 1백 리의 땅을 주며 정착을 돕지 않았소?”1)라고 했다. 이를 보면 온조가 직산 위쪽 안성 쯤에 도읍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백제 초기 도읍이 하남위례성(河南慰醴城)인데 지금 천안의 위례산(慰禮山)과 부아산(負兒山)에 그 이름의 흔적이 남아있다. 여기서 강은 안성천을 말하는 것으로 온조왕이 비류를 미추홀(彌鄒忽)에 남기고 아산만을 따라 직산 근처로 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서거정의 사가시집보유(四佳詩集補遺)에도 직산이 백제의 처음 도읍지였다고 한다.2) 지금도 직산에는 온조왕 제각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평택항의 역사는 온조왕이 도읍을 정하는 BC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평택항의 영웅바위,등대처럼 우뚝 솟은 모습 영웅 닮아
사람들에게 위압과 경외감 주기에 충분
1701년 벼락으로 부서져 옛 모습 사라져

영옹암 고지도

교통이 어려운 70년대 평택 사람들은 싱싱한 회맛을 보기 위해 만호리로 갔다. 지금의 솔개바위가 남아있는 평택해양파출소 뒤편이 바로 배가 닿을 수 있는 부두로 연결된 길이다. 여러 횟집이 있었고 어선들이 즐비하게 정박한 포구였다. 
포구에서 바라보는 아산만의 바다는 검고 푸른 바다였다. 그 바다 가운데 멀리 영웅바위가 있다. 영웅바위를 지금은 온전하게 볼 수가 없다. 1701년(숙종 27) 3월 6일 벼락으로 부서진 탓이다.3) 근대의 길목에서 청일전쟁의 모진 시련을 먼저 예감하기라도 한 것일까. 
영웅바위는 지역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바다 가운데 마치 등대처럼 우둑 솟은 모습이 어느 영웅을 닮아 있었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버린 탓에 일개 갯바위에 지나지 않는 모습일 뿐이다.
영웅암은 전설도 전설이지만 항로표지가 없던 지난날엔 배가 가는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당진 한나루에서 건너오는 배나 멀리 덕적도에서 새우젓을 싣고 들어오는 배가 항로를 놓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갈 수 있었던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지금이야 30m에 지나지 않는 높이지만 옛날에는 백척간두의 높이로 사람에게 위압과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다의 깊이는 항해에 많은 영향을 준다. 육지가 가까우면 큰 배가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아진다. 아산만의 조수간만 차가 9m에 이르는데 잘못 들어오면 갯벌에 들어 얹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이 바다를 통해 행담도에 정박하고 중선으로 갈아타고 남연군 묘를 파헤치러 갔다는 기록을 보면 오페르트가 타고 온 배의 규모는 굉장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1894년 6월 6일 청군이 아산 백석포에 상륙했다는 일본 영사의 보고서에 여흥암(礪興岩)에 청국 군함이 정박했다는 기록이 있다.4) 청국 군함은 아마 영웅바위 부근에 정박하고 소형 선박들로 백석포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여흥암이 어디냐는 것이다. 
본래 영웅바위는 여러 가지로 기록되는데 영옹암(令翁岩)은 대동여지도5) 와 18세기 후반 지승(地乘)6)이라는 지도에 함께 나타난다. 영옹은 지방수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것은 토정선생(土亭 李之菡)을 일컬은 말로 보인다. 이지함이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이 바다가 갈라지면서 영웅바위가 우뚝 섰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18세기 광여도(廣輿圖)의 수원부에는 합옹암(合瓮巖)7)으로 나온다. 1872년 아산현 지도에는 영웅암(灵雄岩)8)이라고 글자를 달리해 나타난다. 글자를 잘못 옮겨 적거나 소리대로 다른 글자를 적거나 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일본 영사 보고서의 여흥암도 일본인이 잘못 듣고 쓴 것으로 보인다.

시인 묵객들이 충청도 홍주에서 바다를 건너 한양으로 오갈 때 영옹암이 예사로 보이진 않았을 터이다. 그들의 글 편이 남아있어 그중 하나를 옮겨본다.

令公9)巖乃在大津之中央 /영공암은 바로 대진 한복판에 있는 바위  
海濤日夜聲澎浪/ 파도가 밤낮으로 소리내며 부서지나
屹然不移亦不僵/ 꼼짝 않고 끄떡없이 서 있는 모습  
嗟乎峙質堅且强 /아 산의 바탕 굳세고 강함이여 
有如大人特立扶天綱/ 대인이 우뚝 서서 하늘을 떠받치는 듯   
舟人敬之報馨香/ 뱃사람들 공경하여 제사 올리며   
呼以令公名固當/ 영공의 이름 붙인 것도 당연하다 하리로다(중략)
削平胡羯安黔蒼/ 오랑캐 평정하고 민생 안정시킬꼬  

택당 이식 선생집(澤堂李植先生集) 시(詩)10) 

영옹암이 있던 그 바다가 지금 평택항이다. 언제부터인가 영웅바위로 불리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파도에 깍인 몸둥이를 힘겹게 올리며 세파에 시달리며 영웅도 때를 못 만나니 한갓 갯바위에 지나지 않는 취급을 받을 뿐이다. 영웅바위가 치솟은 이 바다를 오래전부터 대진이라고 불렀고 조선 중후기 지도가 그려지는 시기에 모두 대진으로 기록된다.
대진은 일명 큰 나루, 한진(漢津), 한나루, 솔개바위 나루(鳶岩津)라 부른다. 남쪽 현덕면 권관리 계두진에서부터 포승면 원정리 한나루 까지 모두가 대진이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지역 지역을 구분해서 이름을 붙였지만 오래 전에는 접안시설이 없어서 배를 대기 좋은 곳에 배를 대기도 했기에 환경변화나 기상 상황에 따라 배를 대는 곳이 늘 일정하지 않았다.

아산만의 물줄기와 산줄기

1871년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서 물의 조종(祖宗-물줄기 근원) 열둘을 열거하는데 세 번째가 대진이다. 대진은 이 물줄기의 아래에 있는 포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물줄기는 현재의 안성천과 진위천 그리고 삽교천이다. 

“셋째는 대진11)인데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양지(陽智, 지금의 경기도 용인 지역)의 곡돈현(曲頓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청양(靑陽)의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공주의 차령(車嶺)에서 시작된다. 돈곶진(頓串津)은 백월산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여양(黎陽)을 경유하여 왕자산(王子山)에 이르러 승선천(昇仙川)을 지나 북쪽으로 행담도(行擔島)로 들어가서 공진(貢津)과 만난다. 미륵천(彌勒川)은 차령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덕평향(德坪鄕)을 경유하여 온정천(溫井川)을 지나서 단포(丹浦)가 되어 팔당(八堂)의 서쪽에 이르러서 돈곶진과 만난다. 그리하여 광교산(光敎山), 성륜산(聖倫山) 이남과 칠현산(七賢山), 성거산(聖居山) 이서와 차령, 각흘산(角屹山), 사자산(獅子山), 오서산(烏棲山), 가야산(伽倻山)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든다.” 

그곳이 바로 아산만이다. 그런데 이 물줄기를 소개하면서 강 이름을 말하지 않고 대진이라고 소개한 것이 이상하다. 이는 필자가 주장하는 대진의 범위가 평택 연안뿐 아니라 당진까지도 포함하는 광역의 개념이기에 그리했는지 모른다. 현재 평택・당진항이라고 병기하는 의미를 임하필기가 먼저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택항 주변 지역에 남아있는 포구들, 권관리 계두진, 장수리 석화진, 신영리 신영포, 신전포, 그리고 만호리 대진, 원정리 한나루, 당진을 보면 한진나루, 안섬포구, 성구미 포구들이 평택과 마주 보며 바닷가 이곳저곳이 포구였다는 사실이다. 영옹암의 전설도 양쪽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진은 딱 ‘여기다’ 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음호에 계속>

1)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 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 安之[『삼국사기』백제본기 제1 온조왕 24년 추7월) 
2) 『사가시집보유(四佳詩集補遺)』제3권 시류(詩類) 「직산제원루시(稷山濟源樓詩)」서(序)
3) 『숙종실록』35권 숙종 27년 3월 20일] 충청도(忠淸道) 서산(瑞山) 땅의 큰 해구(海口)에 있는 영공암(令公巖)이 이달 초 6일에 구름과 안개 속에서 갑자기 벼락으로 부서졌다.
4)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   >   二. 全羅民擾報告 宮闕內騷擾의 件 二   >   (21) [淸國軍 牙山上陸에 따른 諸報告] 발신일 1894년 6월 8일 오후 12시 발신자 在仁川 二等領事 能勢辰五郞  수신자 臨時代理公使 杉村濬 ] 京第30號
5) 令翁岩. 덕산(德山) 경계 내에 포함. 삼도(三島)는 수원 경내. 
6) 令翁岩. 수원부(水原府). 마포진(磨浦津) 안에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오동도(梧桐島), 아산도(牙山島), 진도(津島) 세 섬이 있고 이에 이어서 양성 괴태곶 맞은편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지승(地乘)」, 편저자 미상, 규15423-v.1-6, 간행연도 미상, 6책, 채색지도, 필사본]
7) 「지승」에서처럼, 오동도(梧桐島), 아산도(牙山島), 진도(津島) 세 섬에 이어 令翁岩이 표시되었던 바로 그 위치에 비슷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고, 合瓮巖이라고 표기하였다.  
8) 灵雄岩. 수원지계두봉(水源地鷄頭峯) 앞 행담도(行擔島) 옆에 그려져 있다. 
9) 보통 방백(方伯)을 영공이라고 불렀다.[한국고전번역원 역주]
10) 『택당선생집』 제2권 시 「영공암(令公巖)[면천(沔川)]의 대진(大津) 가운데에 있다.」
11) 아산만(牙山灣)을 지칭하는 것 같다. 세 개의 근원이란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안성천(安城川), 삽교천(揷橋川) 및 곡교천(曲橋川)을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한국고전번역원. 홍승균 역주]
 
글 한도숙

이력
전 평택농민회 회장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전 한국농정신문사 사장
평택섶길추진위원

저서
시집  <딛고 선 땅> 외 2권
칼럼집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주석 윤한택

이력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원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고려대학교 문학박사(고려시대사)
서울대학교 경제학사

저서
<근대 동아시아 외교문서 해제>
<바로 보는 우리 역사>(공저)
<사회과학개론>(공저)
<고려전기 사전연구>
<고려 양반과 兩班田연구>
<고려국경에서 평화시대를 묻는다>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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