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길, 첫번째 이야기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시내길은 시청앞 광장 출발해
매봉·덕동·자란산, 비전동과 
통복·원평동 돌아보는 평택의
원도심 탐방로, 가는 곳마다
사연과 사람들 이야기 넘쳐

 

이계은 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이계은 시민기자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차령(車嶺)의 북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안성천이 드넓은 소사벌을 적시며 유유히 흐른다. 그곳 한 거인이 흙덩이 셋을 흘리고 떠난 자리는 매봉산, 덕동산, 자란산으로 사방의 평평한 너른 땅과 남쪽의 강줄기를 굽어본다. 시내길은 시청앞 광장에서 매봉, 덕동, 자란산을 거쳐 통복천과 통복시장, 그리고 원평동을 돌아 제자리로 오는 평택의 고도(古都) 탐방로다.

오늘은 출발지로부터 덕동산까지의 그 첫번째 이야기다.

 

 

​명법사 대웅전​
​명법사 대웅전​

 

시청앞 광장

시청앞 광장은 2005~2006년 1년여에 걸쳐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담장을 헐며 나무와 잔디를 심고 분수광장을 만들어 조성했다. 당시 담당과장이었던 나는 그곳의 푸르른 소나무들과 분수와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면 추진 당시 사업의 고비 때마다 직원들과 함께 고뇌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 또한 삼천명이 운집했던 초여름 밤의 개장식날 불꽃놀이에 맞춰 솟아오른 LED 분수쇼에 열광하던 시민들의 그 환호성을 잊을 수 없다. 광장이 준공된 후 주변의 아파트값이 오르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매봉산 추념탑과 덕동산 현충탑
나라와 고장을 지킨 사람들의 넋
위로하며 감사의 마음 갖게 해줘

매봉산

4만6000톤 용량의 비전2배수지는 구시가지 전역과 팽성 그리고 K-6 한미연합사까지를 공급하는 시 전역 19개 배수지 중 가장 큰 시설이다. 배수지 위 잔디공원은 주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 옆의 매봉산 정상에는 반공운동 순국자 추념탑이 있다. 우리시 관내 6·25 때 순국한 57명의 반공운동 청년들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 건립한 탑이다. 탑에는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문구가 새겨져 있다.

매봉산 일대는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매입이 완료되었고 2026년까지 조성될 계획이다. 지금의 으슥한 길은 좀 넓히고 자연을 살린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신한고 울타리 언덕에 시에서 심었다는 편백나무에 짝 맞춰 편백나무 숲길을 조성해 봄은 어떨까.

 

평택 교육 선각자 박남규 선생과
양성 이씨 문중 등 지역 사회
위해 헌신한 인물들 다양한 숨은
이야기들은 가슴 뭉클하게 해 

평택교육의 선각자 박남규

1907년생 박남규는 사범학교를 나와 1928년부터 교사생활을 한다. 1945년 해방 후 성동초등학교 첫 번째 교장을 한 그는 장학사와 평택군교육장을 역임하고 퇴임한다. 퇴임 후인 1965년 농협창고를 빌려 화포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가정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쳐 1년 과정을 졸업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모태로 1966년 평택동중학교를 설립하여 1971년까지 교장을 맡는다. 매봉산 기슭의 학교부지는 그와 절친인 평택공제병원 원장 김종화가 기증하였고 그의 제자인 안관석 변호사가 재단을 맡아 토목과 건축공사를 미군공병단의 지원을 받는다. 맹지였던 학교의 진입로는 근처 권투구락부 관장이던 정진모가 기증했다. 정진모는 선친과 친구였던 박남규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6·25 이후 나라는 어려웠고 베이비붐세대를 수용할 학교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던 그 시절 그들이 행한 선행은 우리 사회에 교육열기를 지펴 나라를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린 동력이 되었다. 주한미군 그들 또한 우리 안보 외에도 50~60년대 어려움투성이의 우리사회 곳곳을 함께하며 기꺼이 도움을 준 고마운 이들이다.

그 후 박남규는 팽성의 불교재단 신설학교 청담중·고등학교에 초빙되어 학교를 안정시킨 후 은퇴한다. 은퇴 후 그는 사재 5000만원(현 20억 정도)을 내놓아 ‘재단법인평택육영재단’을 설립 장학사업을 펼친다. 1986년부터 쉼없이 지속되어 온 장학재단은 현재 그의 막내아들 박종범이 이어가고 있다. 박남규 그는 1991년 85세를 일기로 큰 생애를 마쳤다. 당시 성동초등학교 동문회장인 국회의원 권달수는 추도사에서 ‘육척거구에 머리는 항상 빛나셨고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평택인의 은사(恩師)이자 거목이셨다’고 술회했다. 제자의 추도사는 스승을 향한 존경과 유머 있는 극진한 사랑이 담겨있다. 그 댁과 이웃에 살았던 나는 그 어른의 빛나는 머리를 보아 알지만 혹 궁금한 분은 성동초교 교정의 동상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성동출신 독립운동가 원심창의 모습과 함께 볼 수 있다.

 

덕동산 현충탑
덕동산 현충탑

 

덕동산 德東山

매봉산에서 덕동산을 연결하는 평평한 동선의 보행육교는 양쪽을 오가는 이들에게 편리하고 쾌적하다. 덕동산은 다양한 수목이 우거진 도심근린공원이다. 그곳엔 항시 걷는 이들이 많다. 산의 둘레와 능선에 걷는 발길에 따라 길이 생겼고 길마다 나무계단과 야자매트를 깔아 관리하여 항상 보송보송하다. 곳곳에 설치된 운동기구엔 삼삼오오 모여 운동하며 대화하는 이들이 있고 샘이 있는 송림 속 배드민턴장의 통통 울리는 셔틀콕 랠리음이 경쾌하다.

덕동산은 지금이야 도심 속 섬숲이 되었지만 80년대 초까지 만해도 산의 북쪽과 잇대어 배 과수원들이 원곡까지 줄곧 펼쳐져 있었다. 그 펀펀한 과수원 동네는 산지촌이다. 이곡(梨谷)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고 그곳에는 이곡농원도 있었다. 이곡농원과 덕동산 사이인 지금의 남부복지타운과 신세계아파트 일대는 서울농원 자리다. 큰 과수원인데다 벚나무 조경의 경관이 좋아 딸기 철이면 가족, 연인 등 상춘객(賞春客)이 붐볐다. 고려조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시 다정가(多情歌, 이화월백 梨花月百 하고...)에서 보듯 한반도에 배나무가 있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사실 대규모 배농사는 일제강점 이후 생겼다. 육종(育種)연구에 앞서갔던 일본인들은 평택, 안성, 나주가 배농사에 적합한 지역임을 알아낸다. 신고(新高, Niitaka), 장십랑(長十郞, 이른 배), 금촌추(今村秋, Imamura 늦배), 만삼길(늦배) 등이 일본인들에 의해 들여온 품종이다. 그중 과육의 맛이 뛰어난 신고배는 저장기술이 발달하며 널리 퍼져 평택, 안성, 나주배로 통칭되는 대표품종이 되었다.

덕동산의 정상엔 현충탑이 있다. 탑엔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다 순국한 628위의 호국영령이 모셔져 있다.(송탄 둥구재 현충탑, 평택호 현충탑을 합하면 평택시 전체 호국영령은 1979위이다)

경내에 가까이 들어가 보니 탑의 하단판석에 새겨진 글귀가 있다.

‘길손이여 자유인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고이 잠들고 있다고’ 가슴 뭉클한 이글은 그 옛날 테르모필레전투 스파르타전사들의 비문으로 세상 널리 숭상되는 글귀이다.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들이자 아버지였을 628인의 영웅들, 그들의 육신은 죽어 없으나 영혼은 이곳에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숭고한 정신을 일깨워 준다.

무심히 지나던 그곳에서 새삼 마음이 경건해진다.

 

비전동 碑前洞

덕동산과 그 둘레 거의 대부분은 양성이씨 땅이다. 양성이씨 7세 이원부는 고려조에서 상서(尙書, 고려조 六部의 으뜸 벼슬)에 올랐고 10세 이말봉은 조선 초기 호군(護軍, 정4품 무관직) 벼슬과 통정대부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덕동산 인근의 땅들은 그때의 사패지(賜牌地)로 보인다. 덕동산은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시에 협의 매수되고 일부는 종교시설에 희사하였다. 선대의 묘소와 비석들이 있는 양성이씨 선영(先營)은 공원 안에 있다.

1878년생 이성열은 유년시절 조실부모하였으나 부모가 남긴 큰 재산을 근검절약으로 잘 지키고 늘린다. 그는 1919년 기미년 한발로 큰 기근이 생기자 백미 300여석을 풀어 주변 9개리를 구휼하였다. 뜻있는 사람들이 후세에 귀감으로 전하기 위해 양성이씨 선영 아래에 송덕비(평택시 지정문화재)를 세웠고 그곳은 선영의 비석들과 함께 비석거리로 불리웠다. 그 인근에서 나고 자란 26세손 이갑종은 87세로 교장을 지냈던 분이다. 그는 비전동(碑前洞) 지명의 유래가 그곳에서 생긴 것으로 말한다.

 

명법사 明法寺

명법사는 조계종 산하 마곡사(麻谷寺) 말사(末寺)다. 1962년 창건될 때 마곡사에서 비구니스님 홍명덕선사(洪明德禪師)가 주지로 초빙되며 비구니스님(比丘尼僧)들의 도량(道場)이 되었다. 다른 사찰들에 비하여 창건역사가 짧고 절의 규모도 작지만 평택시 전체 사찰 중 신도가 가장 많은 절로 알려져 있다. 도심 속에 위치하여 오고가는 편의성이 좋은데다 포교중심 도량으로 정기적인 법회와 강연 등 활성화된 교육문화 활동이 그 요인이다. 절에서 운영하는 연꽃동산어린이집, 노숙자 무료급식, 독거노인 목욕봉사 등 사업은 대개 봉사활동과 재능기부가 주축이 되고 있단다.

절의 초입에 있는 공덕비는 절의 부지 천여평을 희사한 양성이씨 상서공파 후손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절에서 세운 거다. 절 안쪽의 또 하나의 비석 ‘고대성화화주공덕비(高大成華化主功德碑)’는 절의 창건 당시 신심(信心)이 깊었던 박남규와 부인 고선경의 큰 시주와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법연(法緣)을 맺게 해준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그들은 지역사회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얼마전 천수경의 산스크리스트어 용어들을 조금 공부했다. 어머님 49재를 모시면서다. 그 용어들 하나하나가 참으로 뜻이 깊다. 극락정토(極樂淨土)는 괴로움이 없고 지극히 안락한 자유로운 세상이다.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님은 그곳의 꽃동산을 거닐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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